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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2. 2021

사멧과 나들이

[148~149일차]


함께 일하는 터키인 친구들이 예전부터 한번 같이 나가서 밥을 먹자고 해와서, 현장봉쇄도 풀렸겠다, 늦기 전에 식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우린 야간조인데다가 휴일도 없는데 언제 나가서 밥을 먹냐 했더니 아침에 퇴근하고 세 시간만 자고 벌떡 일어나 점심을 먹자고 한다. 그래 자신 있다 이거지. 알람을 결코 놓쳐본 적이 없는 나도 일어나는 것엔 자신이 있다. 오후 한 시에 우리가 있는 일디즈 호텔 앞으로, 쥬르프와 키 큰 메멧을 차에 태운 사멧이 찾아와 접선하는 것으로 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오후 한 시.


일디즈 호텔 앞에는 텅 빈 도로와 귀를 긁는 까만 고양이만 한 마리 있을 뿐이다.



곧 오겠지.. 누가 하나 안 일어나서 늦게 준비를 했나보지..


..혹시 내가 '언제 한번 밥먹자' 정도의 인사치레를 오해한 건가.


..또 나만 진심이었지.


함께 기다리던 알바생 G가 말한다.


형 그냥 잘까요, 아니면 사멧 집에라도 쳐들어가 깨울까요.


선택은 2번. 괘씸한 사멧놈을 그냥 둘 수 없다.


그리하여 내 인생 처음으로, 외국 현지인의 가정집에 쳐들어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과연 랍세키 과수원 주인의 부유한 자제라는 사멧의 집은 어떨까, 하고 궁금하던 차였다. 취미로 공사일을 한다던 사멧. 랍세키 지주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골목 어딘가의 파란 집, 정도의 G의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 사멧의 집-건물. 이 건물 한 채가 사멧 일가의 소유라는 것 같다. 생각했던 정원이 딸린 대 저택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건물주 집안이었구나.


벨을 누르니 사멧의 어머니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사멧의 친구라고 했더니 코렐리(한국인) 친구 왔으니 일어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샛... 역시 자고 있었네.


잠시 후 사멧이 창밖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내밀고 빵끗 웃으며 인사를 한다. 우리는 빨리 내려오라고 다그친다. 오께이 오께이.. 그렇게 말하곤 사멧은 꽃단장을 하러 사라진다. 꺼벙하게 웃는 저 미소 때문에 미워할 수가 없다.


사멧을 기다리는 동안 마당의 사멧네 강아지랑 논다. 특이하게도 푸른색과 노란색 오드아이 강아지다. 강아지도 오드아이가 있구나. 있는 집은 역시 뭐가 다르네.


하루종일 마당에 묶여 심심했는지 내가 다가가자 필사적으로 다리를 잡고 기어 오른다. 너랑 놀아주고 싶지만 가야할 길이 멀단다.


꽃단장을 하고 내려 온 사멧은 차고에서 자신의 자랑거리인 자가용을 꺼낸다. 차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사멧의(인스타엔 온통 자동차 사진 뿐이다) 자가용이 도대체 뭘까 기대를 했는데 은근히 평범해 보이는 자동차다. 차 보는 눈이 없어서 뭔지 모르겠네. 범퍼를 바닥까지 한껏 낮추고 대포 같은 우퍼 스피커를 뒤에 설치한, 사멧처럼 건방진차. 정말 오랜만에 보는 돌돌이 창문 손잡이가 묘하게 갭 감성이 있다.


미친 스피커

사멧은 뒷자석에 우리 둘을 태워놓고, 앞좌석엔 지나가던 자기 동네 친구를 잡아서 태우고, 차나칼레로 출발한다. 꿈나라에 가서 전화도 안 받는 쥬루프와 메멧은 버리기로 한다.


알다시피,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음은 사람에게 물리력을 직접 행사한다. 차 자랑에 여념이 없는 사멧은 스피커도 자랑하고 싶었는지 음악을 풀 파워로 틀었고, 차 지붕을 뚫고 나갈 기세의 소음에 두들겨 맞은 우리는 귀에 피가 날 지경으로 너덜너덜해진다. 미친놈아, 라고 몇 번이나 외친 뒤에야 사멧은 웃으면서 볼륨을 줄인다. 그러더니 이번엔 170키로로 악셀을 밟는다. 아주 신이 나서.


사멧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전에도 와 본적 있던 아울렛인 부르다17의 푸드코너. 자랑스럽게 맛집을 안내해준다고 데려온 게 푸드코너라니.. 그래서 어느 집이 맛집이냐 하니까 그냥 아무 종류나 고르란다. 버거킹과 파파이스, 그리고 비슷한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다 닭고기와 파스타, 샐러드 삼종 세트를 파는 가게를 고른다.


오이를 빼달라고 했더니 샐러드가 통째로 빠지고 대신 파스타가 곱배기로 나왔다. 바람직하군.


파스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 음식 중 하나인데, 항상 색다른 파스타의 맛을 경험하기 위해 어딜 가든 기회가 될 때마다 꼭 시켜먹는 메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터키의 파스타가 만족스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사람들은 도무지 알덴테라는 것을 모른다. 끝까지 푸욱 익혀 퍼져버린 파스타에 넣은 건지 만 건지 밍밍한 소스(간도 안 한 오일 느낌)가 특징. 치즈향이 날듯 말듯하면서도 그냥 간이 되지 않은 생면만 먹는 것 같다.


어쨌든 기대했던 만족스런 식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를 태워서 여기까지 온 공이 있으니 식사는 내가 쏘는 걸로. 한번에 계산해버리자 사멧이 한국말로 '안돼!' 한다. 안되긴 뭐가 안돼.


가라 사멧!

식후 드라이브겸 사멧이 차나칼레를 한 바퀴 슥 돈다. 어딜 봐도 내가 다 걸어다녔던 곳이다. 그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녔네.


고지대에 있는 한 공원 카페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최근 타이트하게 걸었던 통행제한이 조금 풀려서,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 같다.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지만, 무척 아슬아슬해 보이는 풍경이기도 하다. 다시 코로나가 창궐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 마실 것을 시켜먹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후퇴한다.


드라이브를 끝내고 다시 랍세키로 돌아왔다.


사멧은 자신이 즐겨 가는 카페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갔더니 사멧 또래의 어린 친구(물론 액면가는 그들이 형인 것 같지만)들이 모이는 술집 식당 겸 카페다. 들어서자마자 동양인 두 명에게 쏠리는 시선이 장난이 아니다. 카페 안의 모두가 우리를 바라보고 일순간 흐르는 정적. 다시 시끌시끌하게 떠들기 시작했지만 분명 우릴 의식하는 묘한 공기가 카페 전체에 흐르고 있다.


대충 밀크 쉐이크(이것 또한 밍밍하게 맛이 없었다)를 시키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사멧의 동네 친구로 보이는 녀석들이 하나 둘씩 우리 테이블로 모인다.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서툰 영어로 말을 걸고(니들이 영어를 쓰는 거보다 내가 터키어를 더 잘하겠다..)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사멧은 번역기를 돌려서 상황을 설명해준다.


'누구나 외국인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어색하게 멀뚱멀뚱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별 의미 없이 몇 살이냐, 말도 안돼. 이런 말을 서로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주변에 모인 친구들이 8명까지 늘어나자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멧 그만 가야해. 사멧은 어.. 오오. 하면서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우리를 호텔까지 태워준다.


호텔에 왔더니 야간 출근 두 시간 전이다. 암막 커튼의 어둠 속에서 잠시 잠을 청한다. 한 시간 정도, 라고는 해도 체감시간은 1분이다. 방금 맞췄던 알람이 어느 새 울리고 있다. 방의 불을 켜니 눈에 맺혔던 다크서클이 휘발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게 느껴진다.


휴일이 없어 스스로 만들어 낸 휴일의 대가는 이런 것이다.


그래, 이제는 출근해야 할 시간. 방금 헤어졌던 사멧을 다시 만나러 가자.


그래도 그 녀석이 있어서 일하는 와중에도 웃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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