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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7. 2021

다시 한번 차나칼레

[150일차]

봉쇄가 끝나고 드디어 처음으로 받은 휴일.


2개월 정도 현장과 숙소에만 감금되어 있다가 마침내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진다.


참 긴 시간이었다. 외식도 제대로 못 하고 그저 공사현장 매점 토스트나 사먹으면서 버티던 그 시간들. 그나마 나중에는 배달 음식이 호텔로 올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좀 시켜먹기는 했지만(누가 한국만 음식이 배달된다고 했던가. 터키도 예맥세페티라는 배달의 민족 비슷한 앱이 존재한다).


어쨌든 부푼 마음을 안고 랍세키 숙소 밖으로 나온다. 다행히 날씨는 맑고 공기는 상쾌하다. 일단 숨을 크게 들이마쉰다. 이것이 자유의 향기구나.


오늘은 차나칼레로 떠나기로 했다. 아직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로 가득하다.


일행은 친구인 JB와 최근 유럽 사이드에서 건너 와 같은 컨트롤룸(그러나 나와는 달리 주간)에서 일하는 알바생 O, 두 명이다. 랍세키나 겔리볼루가 너무 구리다고 투덜대는 JB에게 차나칼레의 맛을 보여줘야지. 겔리볼루와는 다르다, 겔리볼루와는..


정류장에 가니 마침 차나칼레행 버스가 막 출발하려 한다. 간신히 버스를 잡아서 탔더니 나름 우등 버스다. 붉고 고급스런 좌석. 가격도 5리라 더 비싸서 20리라(약 3000원)다.


터키의 특징 중 하나는 버스를 무척 고급스럽게 다룬다는 것. 털털거리며 다니는 시골버스의 이미지는 어지간해선 없다. 왠만한 버스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우며, 장거리 버스의 경우 잘 차려 입은 매니져가 한명 있어서 비행기처럼 음료수와 간식이 든 카트를 끌고 나눠줄 때도 있다. 종이컵에 따른 음료수를 빳빳한 휴지로 잡아 나눠주는데 그걸 받아 마시고 있으면 뭔가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확 든다.


깨끗한 햇빛이 버스 실내를 가득 채우는 걸 보며 간만에 몹시 설렌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그냥 생소한 길을 걷는 것 만으로도 여행이 된다. 오늘은 예감이 좋다.


2개월만에 돌아온 차나칼레는 여전하다. 나는 석방된 죄수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강도 높은 봉쇄 정책 덕택인지 최근 터키의 코로나 확진자 수가 좀 줄었다. 1일 3만명 이상이 걸리다가, 최근에는 그래도 1만명대를 왔다갔다 한단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좀 나긋나긋해졌다는 건 내 착각일까. 열린 상점으로 가득한 거리에는 한층 여유가 돈다.


밥을 먹으러 길을 걷던 중 옆눈으로 작은 골목의 노란색이 언뜻 들어온다. 멈춰서 보니 차를 마실 수 있는 아담한 공간이 보인다. 아마도 카페 소유의 작은 정원 겸 테라스가 있는 공간.


이 동네 카페의 특징은, 그 카페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길고양이가 의자에서 잠들어 있었던 예전의 그 카페처럼, 알 수 없는 통로를 구비구비 빠져나가야 하거나, 방의 생김새가 종잡을 수 없거나, 1층도 2층도 아닌 애매한 지형에 걸쳐 있거나, 다락방이거나, 특이한 테라스가 있거나.


즉 '들어가 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 하나 같이 독특한 개성과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자신과 맞는 카페를 찾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 우리의 목표는 커피 따위가 아니다.


귤렌 스페셜 피데

고픈 배를 움켜쥐고 도착한 곳은 바로 귤렌 피데. 정말 오랜만이다.


피데만큼 한국인의 입맛에 무난하게 맞는 터키 음식이 없다. 터키음식 초보인 JB에게 입문용으로 좋은 메뉴라 일부러 이곳을 골랐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은 피데 중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었던 귤렌 피데. 반죽이 쫄깃하게 구워졌고 치즈의 맛도 또렷하다. 소시지인 수죽이 묘한 이국적인 향이 나는 것만 뺀다면 누구나 좋아할만한 맛.


사실 22리라짜리 프리미엄 라흐마준이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평소에 라흐마준이라는 메뉴는 그냥 가볍게 먹는 얇은 터키 피자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피자처럼 그냥 베어먹으면 약간 바삭거린다는 것 외에 딱히 특별하게 맛나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토핑이 뭔가 좀 심심하기도 하고.


하지만 어디선가 터키인들은 라흐마준에 야채를 넣고 돌돌 말아 먹는다는 말을 들었던 걸 기억하고는, 양상추와 양파를 넣고 같이 나온 레몬을 듬뿍(이게 중요하다)짜서 살짝 소금을 치고 돌돌 말아 한입 먹었더니..맙소사. 신세계가 펼쳐진다.


그냥 먹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맛. 그제야 나는 알게 된다. 라흐마준은 터키식 피자가 아니라 '쌈'이구나. 어쩐지 라흐마준을 시키면 맨날 야채를 함께 준다 했어. 내가 토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소'였던 것이다.


라흐마준의 새로운(?) 발견으로 즐겨 찾는 메뉴가 늘어나게 되었다. 어딜 가든 단돈 7리라(1200원 정도)로 극한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라흐마준. 어쩐지 사멧이랑 쥬루프가 틈만 나면 라흐마준을 배달시켜 먹더라.


배가 찬 뒤에 우리는 킬리트바히르 성으로 간다. 나는 예전에 한 번 왔었지만 와보지 않은 JB와 O를 위해서. 성으로 향하는 길에 마른 개를 만난다. 이제 터키에서 개를 만나면 어딘가 짠한 느낌이 든다. 모두가 내 개 같다. 가까이 가면 슥 코를 들이밀며 안겨오는 녀석들.


뭐 성 감상은 그냥그냥 그랬다.


다시 차나칼레로 돌아온 우리 셋은 거리를 서성거린다. 목마를 보고, 성을 보면 이동네 볼거리는 딱 끝나머린다. 이후에 우리의 즐길거리는 오직 먹을 것 밖에 없다.


오늘의 전략은 짧게 조금씩 다양하게 먹기.


지나가다 문득 땡긴 코코레치(양 내장을 구워 빵 사이에 넣은 케밥)를 딱 반쪽만 주문해서, 테이블에 앉아 그걸 또 삼등분 해서 셋이서 나눠먹는다. 코코레치를 굽던 종업원은 몇 번이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는다. 반쪽? 마실 건? 없이? 접시를? 포크는 세개?? 큰 칼 하나??


그래 민폐지, 미안.


겔리볼루에서 쓰고 텁텁한 맛만 났던 실패한 코코레치랑은 다르게, 여긴 빵도 바삭하고 두께도 적절하고 무엇보다 양 내장도 고소하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코코레치겠지.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먹어 봤던 음식들도 지역마다, 가게마다 다르다. 이렇게 길게 터키에 있게 되니 이런 심화 탐식도 가능하구나.


JB와 O에게 내가 예전에 맛봤던 그 느끼함을 맛보여주고 싶어서 헬와 가게에 들어 헬와을 하나 샀다.


'첫 한 포크만 맛있다고. 그 다음부턴 지옥이지.'


그런데 이 집은 첫 포크도 맛이 없다. 그냥 저번 그 집에 갈걸..


아까운 돈.. 이 아니고 리라는 지금 싸니까, 아까운 내 허기..


일용할 양식을 하사하노라


짧고 다양하게 먹으려 했는데 어쩐지 입만 달고 뭔가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차라리 한 메뉴를 진득하게 먹어볼 걸.


남은 달달한 음식을 개미들한테 주면서 잠시 전지전능함도 좀 느껴보고.


뭐 그렇게 다니다가 볼 것도 없고 배도 차서 랍세키로 돌아왔다는 엔딩.


오늘은 일행이 있어서, 어쩐지 새로운 도전보다는 그간 내가 경험한 것 위주로 소개하는 형식이 되어버렸다(나도 모르게). 중간에 O가 차나칼레에 유일하게 있다는 일본 초밥 라멘집을 한번 찾아가보자고 했었는데, 그 말을 들어볼 걸 그랬다. 터키에 왔으니 터키스러운 것만 먹자는 고정관념이 나도 모르게 있었던 것 같다.


본전만 찾자는 주의는 항상 실패하기 마련. 즉흥성이 좀 부족했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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