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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22. 2021

피스타치오 한 줌

[151~156일차]



고위 공무원이 방문하는 날이면 청소하고 꾸미는 건 어느나라나 마찬가지다.


야간조 출근을 했더니 커다란 깃발 세 개가 앵커리지에 펄럭이고 있다. 이미 VIP는 어디론가 가버린 모양이고, 아직 수거하지 않은 깃발은 맞이할 사람도 없이 허공에 나부끼고 있다.


그러나 쓸 곳 없어진 이런 깃발도 우리에겐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마침 비가 오는 날이라 펄럭이는 깃발이 종종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막아준다.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머리에 떨어졌을 물방울 몇 개나마 가져가주는 깃발이 은근히 든든하기도 하다. 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요즘 나와 G와 윈치수 팀장인 S형, 셋이 살아가는 컨트롤룸은 이런 풍경이다. 바람도 추위도 사라지고 졸음과 무료함만이 존재하는 이곳. 몸은 편하지만 일이 많고, 무엇보다 시간이 굉장히 느리게 간다.


가끔 바람이 불어 작업을 못하는 날이면 오지 않는 무전을 기다리며 스무고개 따위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스무고개라니. 그러나 세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토성'을 생각했더니 도전자들의 예상이 이리저리 빗나간다. 어떻게 보면 만질 수는 있지. 직접 볼 수는 없고. 크고. 무겁고. 동그랗다. 학교에서 볼 수 있나. 음 그건 애매하다.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해야하나. 물건인가. 글쎄. 그것은 물건인가? 스무고개란 단순한 게임은 아니다. 존재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작은 방에 갇혀 그렇게 지내다 보면 종종 떠나온 탑정이 그립다. 찬 바람 맞으면서 정신없이 떨다보면 어느덧 퇴근할 시간이 되던 그곳. 오줌을 누면 오줌이 절로 나오던 탑정 공중 화장실 풍경도. 끝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다시 가볼 수 있을까.


그렇다고 밖에 나올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바깥에서 조작해야할 기계도 있어서 종종 바깥바람도 쐴 일이 있다.


잠깐 밖으로 나왔더니 메숫이 손을 팔랑거리며 나를 부른다. 최근 새로 들어와 우리 드라이브 윈치 팀 멤버들과 함께 일하게 된 친구다. 곱슬거리는 앞머리에 키가 크고 뭔가 감수성 있을 것 같이 생긴 메숫은 잠깐만 있어보라며 자기 주머니를 한참 뒤지다가 무언가를 꺼내어 내 손에 쥐여준다. 받아 든 주먹을 펴 손바닥을 봤더니 한 줌의 견과류가 쌓여 있다.


정 많은 터키 친구들은 뭔가 친해졌다고 생각되면 일하다가도 슬금슬금 다가와 이렇게 주머니에서 뭔가를 뒤적뒤적거려 턱 쥐어주곤 한다. 조그만 말린 과일일 때도 있고, 초코바일 때도 있고, 믹스커피 한 포나 새끼 손톱만한 사탕(사탕은 주로 제밀 아저씨)일 때도 있다.


그나저나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 이 견과류는 뭘까. 고맙다고 말하고 컨트롤룸으로 돌아와 찾아봤더니, 이게 바로 피스타치오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네.


생각해보니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견과류들이 있지만 직접 보고 먹어본 건 정말 별로 없는 것 같다. 캐슈넛이 뭔지, 어떤 맛인지 알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림으로만 보던 헤즐넛을 직접 본 것도 이런 식으로 터키 친구들이 손에 쥐여주고 난 뒤었다. 기껏해야 땅콩이나 아몬드, 호두 정도만 알고 먹었지.


자 그럼 피스타치오의 맛은 어떨까. 나는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딱 까고 내용물을 꺼내 입에 넣고 씹어본다. 그리고 충격에 빠져 조개처럼 입을 벌린 그 작은 견과류를 다시 한 번 본다.


뭐가 이렇게 맛있냐..


소금을 넣고 볶았는지 겉껍질에 간이 되어 있는데 그게 피스타치오 특유의 고소한 맛과 어울리면서 '굉장히 맛있는 맛'이 난다. 이건 술안주로 버릇처럼 집어 먹던 땅콩이나 아몬드 따위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터키 친구들이 쥐여준 온갖 먹거리 중에서 내쪽에서 한 번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다.


이후로 지나가는 길에 무척 맛있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더니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 내가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은 다른 사람을 시켜 종이컵에 수북이 담은 피스타치오를 전달해주는 메숫. 안전모에 이름을 '그려'준 답례란다. 덕분에 야간조 긴긴밤을 피스타치오를 까먹으면서 소소하게 행복했다.


그래, 피스타치오의 맛보다는 그들의 다정한 마음이 더 맛있었다..


라고 하는 게 아름다운 이야기겠지만, 근데 솔직히 피스타치오가 너무 맛있었다. 찾아보니 터키가 헤즐넛도 그렇지만 피스타치오가 맛있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피스타치오는 터키산으로! 나는 그걸 원산지에서 먹고 있네.


고마워 메숫. 덕분에 나는 피스타치오에 눈을 뜰 수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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