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시아->아다나
이르지 않은 아침, 텅 빈 호텔에는 나와 숙소 직원인 남자, 그리고 눈 하나가 없는 고양이 한 마리, 이렇게 셋뿐이었다.
반지하 식당에서 남자가 나를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어제의 그 애꾸눈 고양이가 내 앞의 식탁 위로 올라왔다. 카리스마 있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꽤나 애교가 많은 귀염둥이였다. 잠깐 마주쳤던 나를 기억했던 것인지, 아니면 할 일 없어 보이는 인간이라면 아무나라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지, 녀석은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한참을 식탁 위에서 재롱을 부리다가 식사가 도착하자 순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곤 내가 어제와 거의 같은 메뉴의 조식을 별다른 감흥 없이 섭취하는 동안 식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계단을 올라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주워 온 고양이를 기르는 꿈을 꿨던 것처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죽기 직전의 작은 고양이를 집에 데려와 먹이고 씻기고 보송보송한 마른 수건으로 감싸 포근하게 재우는 그런 꿈을 종종 꾸곤 했다. 나도 고양이가 있어, 라는 벅찬 감정을 느끼며, 내일 아침 달라진 세계에서 나를 깨워줄 고양이를 기대하며, 나는 꿈속에서 잠들곤 했다. 그런 꿈은 언제나 비극적으로 끝났다. 자고 일어나면 열린 창문과 빈 수건만 있었다. 때로는 고양이가 열어둔 아파트 창문으로 떨어져 잔혹하게 죽어버리기도 했고, 내 실수로 발에 밟혀 납작하게 터져 죽어버리기도 했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건물에는 나와 남자 직원만 남았다. 남자는 오늘 밤부터 터키 전역이 봉쇄된다고 말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식사나 생필품 구입의 목적을 제외하면 밖으로 나올 수 없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도시 간 이동도 금지된다고 했다. 코로나 하루 확진자가 6만 명에 달하게 된 터키의 극단적인 조치였다.
여행의 앞날이 점점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일단 오늘 밤이 되기 전에 이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어젯밤에 했던 결심, 그러니까 알바니아로 훌쩍 떠나겠다는 그 즉흥적인 결심을 과연 실행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늘 밤, 어쩌면 내일 아침에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해 본 적 없었던 나라의 길거리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있을 것이다. 들어본 적 없는 언어로 웅성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뭐를 파는지도 모를 레스토랑을 발견하고는 각오와 기대가 한데 뒤섞인 기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면서, 익힌지 얼마 안 되는 인사말을 수줍은 발음으로 웅얼거리며 자리에 앉겠지. 그건 마치 꿈처럼 느껴졌지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분명 그곳엔 라마단도 코로나 봉쇄도 없이 자유로울 거야.
나는 호텔 직원인 남자에게 공항으로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을 물었다. 그는 12시 반에 출발하는 미니버스가 있다고 했다. 원한다면 타는 곳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그는 이스탄불의 숙소에서 봤던 그 친근했던 직원처럼 살갑게 말을 걸거나 웃거나 하지는 않았다(마치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이모의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 한다고 하면 항상 인내심 있게 나를 기다려주면서 식사를 차려주거나 시설을 안내해 주거나 했다. 그런 퉁명스러운 친절이 부담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었다.
짐을 다 챙기고 그의 안내를 따라 숙소를 나섰다. 초여름처럼 더운 날씨였다. 다행히 정류소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땀을 흘리며 걸을 필요는 없었다. 조용하게 친절한 그와는 조용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서로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한 번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타야 할 것은 무척이나 작은 미니버스였지만 그것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대가족 한 무리와 커플, 그리고 몇몇 사람들. 수많은 짐들. 운전기사는 솜씨 좋게 내 캐리어를 받아서 차 뒤에 실었다. 차에 앉아 있으려니 꽤나 더워서 출발시간 전까지 근방을 돌아다니며 바람을 쐬었다. 곧 12시 반이 되었고 버스가 출발하자 탑승한 사람들끼리 주섬주섬하며 돈을 걷었다. 공항까지 15리라(약 2천원)였다. 한집안 사람들로 보이는 일가족 덕분에 미니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떠들썩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이어졌다.
타고 나서 알았던 사실이지만 버스는 메르지폰 오토가르(버스 터미널)까지만 운행했다. 공항까지는 또 택시를 타야 한다고 했다. 터키의 폭락한 환율 덕분에 택시에 관대해지기로 했으므로,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택시를 타고 공항을 향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허허벌판 위에 덩그러니 있는 아마시아-메르지폰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항은 내가 생각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공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낮은 건물 한 채가 끝이었다. 모르고 왔다면 그저 아파트 근처 상가건물이나, 잘 쳐줘도 시골 버스 터미널 정도로 보았을 것이다. 거기다 불길하게도, 공항에는 이용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을 내며 서성거리는 사람은 투명 플라스틱 마스크를 착용한 공항 경비들뿐이었다.
나는 이미 알바니아로 가려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은 영화처럼 무턱대고 방문해서 멀리 떠나는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표 한 장 주세요. 목적지는 알바니아.' 따위의 대사를 말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대로, 검색대의 경비원에게 물어보자마자 오늘 알바니아로 가는 비행기는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아까 출발한 비행기가 오늘의 마지막 비행기다.
그렇게 말한 경비원은 내가 혹시나 아쉬워할까봐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곳에 국제선 비행기는 없다.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이스탄불로 가야 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마시아에서 알바니아로 가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스탄불로 돌아갈 것도 아니면서, 그 자리에서 이스탄불 공항의 비행기를 검색해 봤다. 알바니아로 가는 비행기는 내 상상보다 비쌌다. 6~8만 원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20~3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생겼던 꿈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웠다. 결국 나는 라마단과 코로나 봉쇄를 뚫고 터키에서 여행을 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일단 아까의 버스 터미널로 돌아가서 이다음의 행선지를 정하기로 했다. 경비원은 나를 위해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불러다 주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조용했던 공항(여전히 이 작은 건물과 마당이 공항이라는 사실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이 언제부턴가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몇 개의 버스가 공항 앞에 도착해있었고, 그곳에서 내린 것으로 보이는 터키 청년들의 무리가 무질서하게 모여서 서있었다.
그들은 모두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었다. 햇빛에 살짝 그을린 피부, 짧게 자른 머리, 목에 찬 익숙한 무언가. 나는 왜 그들이 이곳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막 군에 입대하는 신병들이었다.
나는 공항 건물 밖의 구석진 벤치에 앉아 택시를 기다리며 그들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곧 군대에 가는 건지 아니면 이미 군대에 소속이 된 건지 모를 그들은 무척이나 해맑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군대에 가는 사람들이 저렇게 신날 수 있을까. 군대라기보다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 같아 보였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광장을 서성거리던 그들 중 몇 명이, 벤치에 앉아 택시를 기다리는 낯선 동양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그들에게 메르하바, 라고 먼저 인사했다. 그들 중 하나가 쑥스러운 듯이 내게 답인사했다.
말문이 트이자 그들은 금세 나를 빙 둘러쌌다. 뭐라고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인 것 같았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어디서 왔냐, 무슨 일을 하느냐, 그런 걸 물어보기도 하고, 자신들의 후줄근한 핸드폰 두 개를 줄 테니 내 핸드폰 하나와 바꾸자고 장난도 쳤다. 그러더니 굉장히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들은 군인이라고 했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허공에 총을 쏘는 시늉을 하는 그들에게 와아 대단해, 하며 맞장구를 쳐줬다. 그들에게 한국의 병역 시스템을 알려줄 언어적 능력은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나를 태우러 온 택시가 공항으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제 즐거운 경험을 할 예비군인 친구들과 작별을 하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터미널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터미널에서 수소문해 본 결과 외출금지와 도시 간 이동 시행은 내일 저녁 7시부터였다. 그 말은 어쨌든 내일 저녁 전까지는 다른 도시로 이동을 끝내고 숙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터미널 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다음 행선지, 어쩌면 마지막 행선지가 될지도 모를 도시를 어디로 정할지를 고민했다. 이스탄불과 아마시아, 이제 막 터키의 두 도시를 지났을 뿐이다. 여행은 아직 중반으로도 접어들지 못했지만 자칫하면 한 도시에서 이동하지도 못하고 출국하는 날까지 가만히 갇혀 있게 될지도 몰랐다.
터키의 도시들 중에서 오직 한 곳에서만 지내야 한다면, 그곳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할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곳은 카파도키아의 풍경이었다. 기암괴석과 동굴 호텔이 있는, 전혀 다른 세계 같아 보이던 그 카파도키아의 풍경. 5년 전의 여행에서 푸른 하늘과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흙길을 ATV를 타고 달리던 그때, 나는 문득 내가 어른이 되고 말았다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나고 나니 나는 여전히 어른이 아니었지만, 그때 느꼈던 벅찬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만약에 한곳에 갇혀 지내야 한다면, 나는 카파도키아의 동굴 호텔에 들어가 혈거인이 된 것처럼 가만히 글만 쓸 것이다.
그런 다짐을 했지만 터미널 안의 버스 회사들을 아무리 수소문해 보아도 카파도키아의 네브셰히르로 갈 수 있는 버스는 없었다. 벌써 두 개의 희망이 날아가 버리자 나는 조금 지쳤다. 결국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아다나였다.
그래, 이 여행의 목적은 결국 아다나에서 아다나 케밥을 먹기 위함이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여행의 가장 마지막 일정으로 남겨두려고 했었지만, 자칫하면 도시 간 이동 금지령이 실행되어 아다나는 구경도 못해보고 여행이 끝날 수도 있었다. 나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세 번째 안을 선택하기로 했다.
아다나로 향하는 버스표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버스표를 받자 아침부터 심란했던 마음이 그제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목표는 정해졌다. 나는 아다나로 갈 것이다.
버스의 출발시간은 밤 아홉시 반이었다. 그 말은 거의 하루 종일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예정에는 없던 마을을 여행할 시간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나는 두근거렸다. 새삼스레 지도앱을 켜서 이 마을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메르지폰'. 그저 버스 터미널을 이용하기 위해 스쳐 지나가려고 했던 이 마을의 이름은 메르지폰이었다. 나는 터미널을 빠져나와 시내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메르지폰은 관광지의 느낌이 전혀 없는 차분한 마을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오직 나만이 여행을 목적으로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가게 대신 세제와 슬리퍼를 가판대에 잔뜩 쌓아둔 마트들이 있었고, 영어 간판을 건 으리으리한 레스토랑 대신에 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부채질을 하며 단골손님을 맞이하는 조그만 동네 식당들이 있었다.
역시 이곳에서도 식당 내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은 없는 듯했다. 모든 곳이 포장 주문만 허용되었다. 나는 정겨운 느낌의 식당에서 터키식 피자인 피데와 라흐마준을 한 장씩 사서 가지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길바닥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공공시설의 느낌이 나면서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이 식사를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음식이 식기 전에 자리 잡은 곳은 어느 공원 근처의 이발소 앞이었다. 주차해놓은 오토바이가 소소한 가림막 역할을 해서 나름 든든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구석진 식당에서 의외로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는 건,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닐봉지 안에서 수증기를 듬뿍 머금고 물처럼 흐물흐물해진 피데를 한입 먹었을 때 나는 정겨움과 맛은 별개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터키식 쌈인 라흐마준은 함께 싸먹을 야채도 없어서 그냥 그것만 먹어야 했다. 어쩐지 이스탄불을 떠난 이후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아쉬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을은 평화로웠다. 눈을 돌리는 곳에는 꽃과 거위, 양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길은 관광지나 맛집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집과 직장을 오가며 밟는 길이었다. 라마단과 코로나 봉쇄로 인해, 일상보다 한 걸음 정도 더 아래로 가라앉은 듯한 조용한 길. 뭔가가 있었으나 텅 비어버린 것 같은 한낮의 길. 이번 여행 중 계속 익숙해져야 할 그런 길이었다.
발가락 사이에 생겼던 물집은 밟을수록 더욱 커져갔다. 계속 걷다 보면 머지않아 굳은살로 변해서 괜찮아지겠지만 아직은 걸을 때마다 쓰라렸다. 가게와 농장, 아파트와 농가, 벌판과 도로를 보며 걸어 다니다가, 한적한 공원을 발견해서 잠시 쉬기로 했다.
적당히 눈에 띄지 않게 앉을 만한 곳을 찾던 중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히잡을 쓴 그녀는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읽고 있는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실외에서 책을 읽을 때의 그 기분을 나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살던 자취방 앞에는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높은 언덕 위에 숨겨져 있는 놀이터라 평일 오전쯤 되면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의 벤치에 앉아서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를 한참 읽었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받은 책의 페이지는 문서가 아니라 낯선 사물 같았다. 형광등 아래서 정보를 얻기 위해 보던 그런 것과는 달랐다. 무언가 깨알 같은 문양이 새겨진 두꺼운 종이 지갑 같은 느낌이었다. 글자를 읽기에 페이지에 반사된 햇빛은 너무 눈부셨고, 책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운 바람이 자꾸 얼굴을 간지럽혔지만, 꽤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앉아서 읽었던 기억이었다. 공교롭게도 읽던 부분도 햇빛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녀도 아마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읽을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는 잠시 그녀가 무척 부러웠다.
시간이 조금 지나 피로가 조금 풀린 발에 힘을 주고 일어나 마을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가 떨어지며 조금씩 어둑어둑해지는 걸 보니 슬슬 아다나로 가는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서 아까 보았던 터미널 앞의 시장에 들렀더니 어떤 가게 앞에 사람들이 잔뜩 줄지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라마단 금식과 코로나 때문에 식사는커녕 문을 연 식당조차 보기 힘든 상황에서 드문 일이었다. 뭔가 활기찬 분위기에 이끌려 뭔지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그들 사이에 섞여 줄을 서버렸다.
자세히 보니 그 가게는 빵집이었고 팔고 있는 것은 라마단 피데라는 빵이었다. 그러니까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물과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금식을 하는 무슬림들을 위해, 해가 떨어지자마자 먹기 위한 특식인 라마단 피데를 구워서 팔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라마단 기간이 아니라면 접할 수 없는 음식이 아닌가. 나는 우연히 만난 기회에 무척 설레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이것은 '갓 구운 빵'이다. 정확한 타이밍이 아니면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것이 방금 만들어낸 신선한 빵이다.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실시간으로 분주하게 반죽하고 화덕에 구워 빵을 만들고 있는 제빵사들을 보니 기분이 무척이나 흐뭇해졌다. 허탕을 쳤던 공항이나 있지도 않았던 알바니아행 비행기 따위는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다. 오늘의 행운은 오직 이 라마단 피데를 먹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빵을 굽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며 기다렸더니 줄은 금세 사라졌다. 제빵사는 무슬림도 아닌 낯선 검은 머리의 동양인에게 푸근한 미소와 함께 라마단 피데를 봉투에 넣어 건넸다. 봉투 너머로 기분 좋은 온기가 손에 전해졌다. 갓 구워낸 큼지막하고 따끈한 빵이 겨우 500원 언저리밖에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두 배로 덥혀줬다.
빵만 먹으면 심심하니 곁들여서 먹을 다른 먹거리가 있나 두리번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은 사과였다. 생각해 보니 어디선가 아마시아의 특산물이 사과라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미 아마시아를 지나치긴 했지만 이곳 메르지폰이나 아마시아나 같은 동네니까 결국 같은 사과일 터였다.
대단하다는 아마시아 사과를 맛이나 보려고 사과를 하나 주문했더니 사과장수는 무조건 한 번에 최소한 다섯 알을 사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필요한 건 오늘 저녁으로 먹을 딱 한 알의 사과일 뿐이라서 대충 설명을 했지만 사과장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뭐 그것이 이곳의 법칙이겠거니 하고 더 실랑이를 하지 않고 다섯 알을 사기로 했다. 물론 가격은 한국에서의 사과 한 알 가격보다도 훨씬 쌌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과일을 잘 먹지 않는 내가 썩기 전에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우선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당분간 끼니 때마다 후식으로 비타민을 열심히 챙겨 먹기로 했다.
터미널 근처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나는 오늘의 조촐한 저녁 식사를 즐겼다. 사과와 빵. 갓 구운 라마단 피데는 예상대로 쫄깃쫄깃하게 맛있었다. 버터나 우유를 넣은 종류의 부드러운 맛은 아니었지만 구수한 밀가루와 소금만으로 만들어진, 중독적인 탄수화물의 우직한 맛 그대로였다. 별다른 맛이 첨가되지 않은 탄수화물을 꾸역꾸역 목에 밀어 넣을 때의 그 쾌감. 그런 것이 종종 당길 때가 있었다. 먹다 보면 물릴 수도 있을 그 맛을 쏟아지도록 잔뜩 뿌려 놓은 깨의 고소함이 질리지 않게 잘 잡아 줬다. 사과는 한국의 능금 사과 정도의 맛을 기대했지만 아삭하기보다는 좀 더 푸석푸석했고 미지근했지만, 그럼에도 싱싱했고 나름대로 달콤한 맛이 사과 전체에 고루 퍼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피데'라는 것은 터키에서는 여러 종류의 다른 빵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오늘 점심으로 먹었던 터키식 피자의 이름도 '피데'고, 지금 먹고 있는 둥근 빵도 '피데'다. 식당에서 종종 케밥과 곁들여 먹도록 나오는 둥글고 납작한 빵도 '피데'다. 그러니까, 오늘은 '피데'의 날인 것이다.
하늘은 구름이 몰려들며 점차 어두워졌고 가로등과 창문에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금식을 끝내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마을 사람들의 품에는 음식이 든 봉투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부드럽고 습한 저녁의 봄바람을 맞으며 야외 식사를 하는 내 발밑으로는 쉴 새 없이 깨가 부슬부슬 흘러내렸고, 얌전한 개들이 뭔가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눈치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조용했던 도시는 저녁을 맞아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터키에서 많은 음식을 먹고 식당을 돌아다녔지만, 지금의 이 식사는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라마단 단식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보상으로 먹는 이 라마단 피데를 혼자 즐겼다는 것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무척이나 든든하고 기분 좋은 식사였다. 볼링공만한 지름을 가진 큰 빵을 반 정도 뜯어먹은 다음 봉투에 넣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것은 긴 버스 여행 동안 배가 고플 때 입을 달래 줄 간식거리가 될 것이다.
밤 아홉시 반 정도에 아다나행 버스가 도착했다. 내가 표를 샀던 버스 회사 아저씨가 시간차로 계속 몰려드는 버스들 사이에서 내가 탈 버스를 알려주기 위해 계속 케어해줬다. '언제 오는 버스를 타면 되나'라는 사소한 질문 하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평생에 다시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게 될 그의 친절이 무척 고마웠다.
나는 긴 밤을 지나 나를 내 인생에서 가장 중동에 가까운 도시, 그리고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표를 이룰 도시로 옮겨다 줄 버스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좋은 버스. 터키의 대부분의 버스들은 모두 그랬다. 버스에 오르기 전 문득 돌아봤더니 혹시나 그 버스까지 못 걸어갈까봐 지켜보고 있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시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터키 인부들이 내게 들어 보였던 엄지손가락. 그것은 땡큐, 좋아, 다 괜찮아, 고마워, 타맘(ok), 잘가, 그래, 걱정 마, 이건 기본이지, 하쿠나 마타타, 반가워, 그런 것들이 모두 합쳐진 것 같은 터키식 제스처였다. 나도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아마시아로 오기 위해 낮 버스를 이용했더니 멀쩡한 하루도 날리고 잠 시간도 꼬이고 해서 숙소비도 아낄 겸 앞으로는 밤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버스나 비행기 의자 위에서도 침대처럼 편하게 잘 수 있는 나였다. 12시간 가까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 보면 나는 중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음식의 도시, 아다나에 도착해 있겠지.
슬슬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을 준비해야 할 시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터키 버스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세 시간 언저리마다 들르는 휴게소 덕분이었다. 짧게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가, 꿈의 도중처럼 휴게소에 도착했다. 비몽사몽으로 휴게소에 들어간 나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배도 그리 고프지 않아서, 부담이 덜 되는 음식으로 요기를 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딱 좋은 음식이 있었다. 아마시아로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보았던 현지인들의 식사처럼, 렌틸콩 수프인 메르지멕 초르바를 끼니로 먹어보기로 했다. 터키에서 가장 소박하고 대중적인 식사. 아니나 다를까, 앞에 줄을 서 있던 두 명의 터키 현지인들도 모두 메르지멕 초르바를 골랐다. 나 역시 그들처럼, 조명 아래 뷔페처럼 차려진 음식들 사이에서 노란 빛깔이 나는 메르지멕 초르바를 한 그릇만 선택해 주문했다. 쟁반을 가지고 빈자리로 향하는 동안, 그릇이 넘치도록 가득 담긴 수프에서는 구수하고 푸근한 냄새가 코로 올라왔다.
어릴 적에 콩이라면 기겁을 하면서 콩밥이 나오는 날에는 숟가락 만으로도 모조리 콩을 골라내고 밥을 먹다가 마지막에 알약처럼 물로 삼켜버리던 내가 자진해서 콩 수프를 시켜서 먹게 될 줄이야. 자리에 앉은 나는 내 몫으로 구입한 메르지멕 초르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에, 방구석에 앉아 만화로 된 성경을 읽을 때 보았던 그 에서의 '팥죽'을 기억했다.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넘겨주며 얻어먹었던 그 팥죽의 정체는 바로 이 눈앞의 렌틸콩 수프였다. 그때 돌았던 군침이, 아직도 내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이렇게 튀어나오다니.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수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렌틸'콩 수프는 내가 생각하던 일반적인 콩의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옥수수 수프 같은 고소함에 육수의 구수한 감칠맛이 있었다. 완전히 갈리지 않은 렌틸콩의 부스러기가 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기분 좋게 씹혔다. 나는 저녁으로 먹다 남겨 두었던 라마단 피데 빵을 꺼내 수프에 적셔가며 허겁지겁 먹었다. 깊은 밤중에 접할 수 있는 최고의 야식이었다.
버스에 돌아온 나는 무언가 충만해진 기분을 느꼈다. 아무런 일정도 아무런 여행도 아니었던, 아무것도 아니었던 오늘이었는데 가슴인지 배인지 모를 어딘가가 묵직하게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머리와 가슴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가슴과 배도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까무룩 잠이 든 사이, 버스는 어둠을 뚫고 계속 달렸다. 남으로, 그리고 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