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교육적이지 못할 때, ‘학교 없는 교육’을 상상하자. 누군가는 이미 그 상상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 상상이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현실이 되는데 보탬이 되고자 이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가 하는 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허황된 생각으로 보일 것이다. 언스쿨링(자기주도교육)을 포함해 홈스쿨링이 아직 법적으로 인정도 받지 못한 상황이니까. 하지만 나는 꿈을 꾼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불필요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초등 및 중등교육 단계에서부터 아이들 하나하나의 재능을 키우고 가능성을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런 사회로 향하는 길은 분명 있다. 공교육을 조금만 언스쿨링처럼 바꾸면 된다. 그것이 더 확산되어야 할 미래교육의 비전이다.
1939년생인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을 다 마치지 못했고, 47년생인 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공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그 가난한 부모가 자리 잡은 한 시골 마을에서, 나는 82년 초에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집에서 가장 먼저 4년제 대학에 들어간 나는 사회학 박사를 마쳤고, 아내는 영문학 석사를 받았다. 미국에서 희소질환을 갖고 태어난 12년생 아들은 유치원을 마친 후 현재까지 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있다. 이런 삶을 살다 보니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학교와 교육이란 많이 겹치지만 분명히 다른 것이다.
가난한 지역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 공교육이 없었다면, 내가 학자가 될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초중고 12년은 가야 하니까 가는 곳에 가까웠다. 성적은 좋았지만 수업 중에 공상하는 경우가 많았고, 추억들도 많지만 안 좋은 기억들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집에는 책이 거의 없어서 교과서 받는 날을 좋아했으며, 아버지의 관심은 받으려는 생각도 안 하게 되었지만 선생님의 관심을 받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지금도 어느 가정에는 책이 적고, 부모의 관심이 적고, 개인 컴퓨터가 없고, 무선 인터넷 연결이 안 되며, 주말에도 서점이나 과학관에 가질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공교육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이다. 그래서 더 공교육을 바꾸어야 한다. 학교가 더 교육적인 곳이 되어야 한다.
나의 아들이 언스쿨링이라는 교육방법으로 불필요한 스트레스 없이 잘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뿌듯하지만, 나는 언스쿨링이 공교육을 대체할 것이라고 보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학교는 필요하다. 다만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 변화의 핵심에 ‘개별화’가 있다고 본다. 개별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핀란드의 공교육 시스템을 자주 얘기한다. 분명 하나의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이다. 변화된 학교에서는 경쟁은 극적으로 줄어들고 학습자 개개인의 발달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육이 펼쳐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굳이 각 가정에서 언스쿨링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때의 공교육은 얼마간 자기주도교육의 철학을 담게 되는 것이리라.
물론 이는 대단히 어려운 변화다. 말하자면 중등교육에서 대학입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현재 80%라면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20%가 될 것이다. 공교육 시스템을 이런 식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반발이 대단히 클 것이다. 왜냐하면 공교육 문제는 입시문제, 사교육문제, 그리고 근본적으로 계급 재생산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변화의 과정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치들과 새로운 인식의 기반이 필요하다. 잘 알려진 조치들 중에는 대학들을 평준화하는 것과 직종별 임금 격차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정책적으로는 방법들이 나와 있다. 하지만 엄청난 반대를 예상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아주 인기 없는 조치들이다. 게다가 이 책은 그런 정책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정책들이나 혹은 그보다 나은 방법을 통해서 전 사회적으로 학습자 존중의 교육을 구성해 낼 준비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쓰였다. 그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함께 그 교육 모델을 그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자기주도성이 펼쳐지는 교육을 우리는 좀체 그리기 어려워한다. 그럴 만도 하다. 자기주도교육이라고도 불리는 언스쿨링은 우리 사회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다. 일례로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이라는 책이 2017년에 나오고, 근래에는 오은영 박사의 프로그램에 홈스쿨링 가정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그 구체적인 모습은 블랙박스와 같다.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그 교육방법이 통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쓴다. 그렇다고 언제 올지 모를 미래만을 위해서 쓴 것은 아니다. 학령기 아동이 포함된 각 가정에서 ‘학교 없는 교육’이 자신의 가정에 맞을 수 있는지 살펴보시면 좋겠다. 그중 일부가 가정에서 자기주도교육을 시도하고, 또 이 방법이 지닌 가능성을 알아본 이들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학교에서도 이런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하기를 바란다. 그 흐름이 커진다면 학습자 중심의 교육이 몇몇 사람들만의 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리즈의 내용과 구성
책이 될 이 시리즈는 언스쿨링의 교육학과 홈스쿨링의 사회학 작업 결과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학자로서 저자는 2019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이 교육방법과 철학에 대한 공부를 해왔고, 그해 여름부터 12년생 아들의 언스쿨링이 시작되었다. 또한, 탐색적 수준이지만 언스쿨링을 지향하는 홈스쿨링 가정들을 만나며 참여 관찰을 해왔고, 여러 가정들이 블로그 등을 통해 공적인 공간에서 내놓는 기록들을 참고했다. 이 책에 나온 특정 가정들 및 아동들에 대한 묘사는 대부분 익명으로 처리했고, 일부는 저자 가정의 사례임을 밝혀둔다.
용어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미리 밝혀두자면, 홈스쿨링의 일종인 언스쿨링은 특히 학습자의 관심과 의사를 존중하는 교육법이다. 관련 연구를 가장 깊이 했다고 할 수 있는 피터 그레이Peter Gray는 언스쿨링보다는 자기주도교육self-directed education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언스쿨링은 스쿨링schooling을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표현이라서, 학교 교육에 대비된 것으로서만 의미를 갖게 되기 쉽고 그것은 오히려 더 넓게 정의될 수 있는 이 교육법을 스스로 가두는 용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스쿨링이라는 용어 역시 널리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기에 이 책에서는 언스쿨링과 자기주도교육이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번갈아가며 사용한다.
이 시리즈는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우리 사회가 자기주도교육을 필요로 하는 이유들을 다룬다. 1장에서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교육의 문제들을 짧게 다루고 넘어간다. 2장과 3장에서는 이런 새로운 교육방식을 선도적으로 시도하는 이들의 노력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들과 그 노력이 뒷받침하는 대안적인 가치들을 살펴본다. 2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자기주도교육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우선 4장에서 학교 교육과 비교를 하고, 5장에서는 이 교육방법이자 철학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등장했고 지금까지 어떤 연구들이 되었는지 일별 한다. 6장은 앞으로의 실증 연구들이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가설들을 제시함으로써 학술적 발전과 대중적 관심 사이의 다리를 놓는 시도를 한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이러한 교육방법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지침들을 제공한다. 특히 7장은 학문 영역별로 아이들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 메커니즘과 접근법을 설명한다. 8장은 실제 가정들의 실천 모습들에서 건져낸 제안들을 공유한다. 9장에서는 각 가정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단위에서도 자기주도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제안들을 하고 있다. 무엇이 바뀌어야 이 교육철학을 실천하여 21세기에 어울리는 교육을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지 논의하는 것이다.
많은 기대를 희망한다. 우리 교육의 대안을 꿈꾸는 자들은 알고 있다.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