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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석 Jul 10. 2024

1장 이 시대 우리 교육의 문제

우리는 대부분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학교에서 자녀 교육을 도모한다. 즉, 부모들은 때가 되면 자녀들을 학교로 보내고, 어린 아이들은 자라서 학교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국가는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커리큘럼을 짜서 보급하고 선생들을 선발하고 관리하며 감독한다. 산업이 발달한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이런 방식을 기본 틀로 활용하고 있다. 서구 사회를 따라잡으며 20세기에 근대화를 이룬 한국은 교육 면에서도 눈이 부신 수준의 변화를 겪었다. 부모들의 교육열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는 더 많은 학교들을 만들고 부모들은 더 나은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기 위한 경쟁을 해온 것이 지난 70여 년의 교육사이다. 


논의가 사회와 국가로 확장되고 있지만, 다시금 개인의 문제에 집중해보자. 학습자로서의 아동과 청소년 말이다. 학습자들이 학교를 통해서 교육을 도모하는 방식에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는 심각한 문제 하나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학교 교육 12년을 받다 보면 학습자들은 미취학 시기의 아동일 때는 없던 습관이 하나 생기게 된다. 그것은 바로 점수를 받기 위해서 학습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학습의 동기를 외적 동기라 하고, 그것이 항상 문제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외적 동기가 내적 동기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학습의 주된 동기가 바깥에서 오지, 내면에서 나오는 일은 점점 없어진다는 것이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런 방식의 교육에 익숙해지면 대부분의 학습자들은 이런 식의 사고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나 혹은 내 부모를 만족시킬 점수를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이다. ‘이 수업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혹은 ‘이 과제를 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성장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관심과 흥미로부터 출발하는 학습 습관이 심각하게 약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자들의 모습은 이미 선진국화된 한국의 사회경제적 조건들, 즉 지식정보화사회에서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의 활용해야 하는 사회적 필요와 매우 불합치되는 모습이다. 물론, 근래 4차 산업혁명 담론이 전망하는 변화상이 모두 펼쳐질 가능성은 낮지만, 그 변화상의 10%만 현실이 된다고 해도 이 불일치는 심각한 문제를 낳을 것이다. 과거 산업화 시대 방식의 교육방식은 창의성을 희생시켜서라도 주어진 문제에 의심을 하지 않고 바른 답을 찾는 성실한 학생을 만드는 교육이었다. 이런 방식은 미래의 교육이 되지 못할 과거의 교육이다. 


‘창의성’을 강조하는 근래의 시대적 상황과 담론을 고려하면 학습자의 내적 동기는 참으로 중요하다. 창의성은 개인의 자유와 내적 동기를 북돋는 환경에서 꽃이 피는 인간의 특징이다. 외적 동기는 지금보다 훨씬 덜 중요해지는 변화가 필요하다.  즉, 그 과정이 학생들의 지적 해방을 추구하는 길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창의적 에너지를 썩히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외부 평가가 학습자의 주된 동인인 지금의 방식에서 내적 동기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시켜 나가기 전에 우선 현재 상태를 더 확연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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