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한 순간, 조용히 찾아온 기적
결혼이 계획에 없었던 것처럼, 아이 역시 내 인생 계획에 없었다. 작고 시끄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을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카페에서 뛰어다는 아이, 식당에서 소리 지르는 아이, 의자를 발로 차는 아이. 어디서든 거슬리는 아이들 때문에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기 일쑤였다. 내가 당시에 그런 아이만 만났던 건지, 아니면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탓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아이들은 그렇게 무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결혼을 하고서도 남편과 나는 아이 생각이 없었다. 신혼다운 신혼생활을 해보고 싶었기에 아이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빚을 얻어서 시작한 결혼이다 보니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우린 돈을 조금이라도 모아서 아이를 낳는 것에 뜻을 모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회사,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함께 지내다 보니 2년쯤 지나자, 저녁에 집에 오면 대화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임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신은 예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 나는 월경과 배란이 규칙적이었기에, 날짜만 잘 맞추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다르게 아이는 3년이 지나도록 와주지 않았다. 달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테스트기를 몇 개씩 사두었다. 예정일이 지나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테스트기를 꺼냈다. 몇 분이고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한 줄이 또렷이 떠오르면, 한숨과 실망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중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결혼하면서 난 팔에 임플라논이라는 피임 시술을 받았다. 임신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선택한 것이었다. ‘괜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책감이 조용히 마음속에서 커지고 있었다.
그 자책감은 나를 병원으로 이끌었다. 병원 대기실에서 아기수첩을 들고 선 임산부들이 눈물이 날 만큼 부러웠다. 그들을 보며, 나도 가질 수 있다는 희망과 나는 어째서 갖지 못하는가의 절망이 교차했다. 어느 한쪽이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에 남편과 함께 여러 검사를 받았다. 나팔관 조영술, 초음파검사, 피검사, 남편의 정액검사. 모든 난임검사에서 우린 둘 다 정상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자연임신을 권하셨다. 매달 정확한 배란 날짜와 시간까지 뽑아, 그날 꼭 관계를 가지라 했지만 그건 마치 숙제처럼 느껴졌다. 결국 6개월 뒤, 우리는 난임판정을 받았다. 난임이라는 단어 앞에서, 인생은 또다시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지난한 인공수정의 길로 들어섰다.
과배란을 위해 처방받은 약을 먹어야 했고, 집에선 배에 자가주사를 놓아야 했다. 난포 개수와 크기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다. 인공수정 시술 자체는 그리 아프지 않았다. 그저 불편할 뿐. 시술 후에는 이번엔 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치 임신한 것처럼 조심해서 다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세 번의 시술이 실패로 돌아가자 나는 점점 지쳐갔다. 한 달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말없이 쳐지던 남편의 어깨를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뒤돌아 울던 맘고생에 비하면 몸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 번째 시술 날, 병원에 들러 시술을 받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하필 특히 더 조심했어야 하는 그날,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난 급한 회계자료 정리하느라 새벽 3시가 되어서야 퇴근했다. 거실 바닥엔 술에 취해 잠든 남편이 있었다.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혼자 속앓이 했을 남편의 등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화가 난 남편은 다음 날 회사에 가자마자 내 사표를 냈다. 나와 의논을 하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그토록 나를 증명하고자 애썼던 회사를 떠났다.
근 10년 만에 삶에 여백이 생겼다. 회사를 안 가니 늦잠을 자도 좋으련만, 어김없이 6시만 되면 눈이 떠졌다. 일에 쫓겨 2순위가 됐던 집안일을 이제야 찬찬히 해보기 시작했다. 아침을 차리고 남편을 배웅하고 청소를 하며, 여느 주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다. 몸이 편해지자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자 거짓말처럼 퇴사 한 달 만에 자연 임신이 되었다. 이 기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더니, 정말 마음 편한 게 최고인가 싶었다. 병원에서 아기를 확인한 뒤로는 조심, 또 조심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와준 아이. 혹여나 잘못될까 뛰지도 않았고, 무거운 것을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다음 진료일, 난 또 한 번 무너지고 말았다. 아이의 심장이 뛰지 않았다. 초기에 자연유산 되는 경우가 많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수술을 했다. 나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남편은 수술실 앞에서 아기를 떠나보냈다. 아기를 잠시 품었다가 잃은 상실감에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다. 희망과 실망이 번갈아 오갈수록, 점점 체념해 가는 나를 발견했다.
‘아이 없이 이대로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이토록 힘겹게 얻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 후, 나는 인공수정을 포기했다. 붙잡고 있을수록 마음이 무너지는 ‘임신’이라는 기대도, 더는 붙잡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있었다. 아이 없이 살아가는 삶도 괜찮을 거라 여겼고, 어쩌면 그것이 나를 덜 아프게 만드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배가 봉긋한 여자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임신은 축복이다. 난 그들이 부러웠고, 축복받지 못한 마음 한구석이 쿡, 하고 아렸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다시 임신을 했다.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이가 나에게로 왔다. 혹시 또 잘못될까 두려워 양가에 알리지도 못하고, 안정기에 접어들기만 기다렸다. 3개월이 지나, 의사 선생님한테 괜찮다는 말을 듣고 난 후, 비로소 나는 남들의 축하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는 뱃속부터 순했다. 입덧을 하지도 않았고, 아프게 배를 발로 차지도 않았다. 그렇게 열 달을 꼬박 채우고 나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 아이는 지금, 아홉 살이다. 가끔 그때를 돌아보면, 참 신기하다 싶다. 그렇게 애쓰고, 그렇게 애달파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정작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에야 찾아오다니 말이다.
아마도, 삶은 그렇게 뜻밖의 장면으로 우리를 구하는 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 *
혹시 지금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면,
포기하지 말아요.
당신의 그 마음도, 분명히 꽃을 피워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