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집 앞 골목길을 걸어 어디론가 가고 있던 내 앞에 작디작은 고양이가 울면서 달려들었다.
마치 아는 사람을 찾은 것처럼.
마치 왜 이제 왔느냐고 꾸짖는 것처럼 아기 고양이는 나를 보며 울어댔다.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거두지 않으면 그 작은 생명이 한여름 뜨거운 햇빛에 말라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게 있어서 주변을 살펴봤다. 혹시 고양이 집 같은 게 있는지, 어미 고양이가 잠깐 잃어버린 새끼는 아닌지. 골목길 주변에 작은 공터와 풀숲을 들여다봤다. 어미 고양이가 머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 20분 정도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며 어미를 기다렸다. 날은 더웠고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생각은 그때까지도 없었다. 일단 집에 가서 물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아 줬는데 먹지 않았다.
‘혹시 배가 고픈 건가?’
집에 새끼 고양이가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얼른 다시 나가 우유를 사 왔다.(강아지나 새끼 고양이에게 사람 먹는 우유는 주면 안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집에 와보니 놀랍게도 고양이는 내 침대에 올라가서 자고 있었다.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심지어 내가 들어왔는데 깨지도 않았다. 아니, 침대가 자는 곳인 줄은 어떻게 알고 올라간 건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고 놀랍다.
일단 집에 들여놓았기 때문에 조심히 목욕을 시키고 동물 병원에도 데려갔다.
수의사 선생님이 생후 두 달 정도 된 것 같다고 하시고는 이맘때쯤 새끼들이 많이 버려진다고 하셨다. 길에서 살아가는 환경이 척박하기 때문에 어미 고양이들이 새끼들을 멀리 떼어놓는다고.
내 눈엔 어떻게 봐도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작기만 한 아이인데…. 길에서 살아가는 그 많은 고양이들은 언제 혼자가 되어서 어떻게 살아온 걸까 싶었다.
그렇게 여름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 두어 달은 주변에 입양할 사람도 찾아보고, 캣맘 카페에 사진도 올려봤는데 품종묘가 아닌 이상 입양이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때쯤 벌써 여름이와 살며 정이 들어서 ‘그래. 이렇게 가족이 되는구나.’ 하면서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벌써 8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
수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여름이는 봄에 태어난 아이지만 우리가 만난 건 여름이라 ‘여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도 여름이라는 이름이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여름이에게 참 잘 어울린다.
그런데 실제로 집에서는 아가, 강아지, 귀요미, 공주님, 코코, 둥둥이, 말썽꾸러기, 복순이, 콩순이, 콩떡이 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물론 그걸 지어주고 부르는 사람은 나다.
언젠가 내가 여름이를 부르는 이름을 모두 한번 적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200개쯤 될까?
여름이를 보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나 생각이 든다. 아무런 조건 없이, 바라는 것도 없이, 매 순간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나도 내가 몰랐던 내 모습에 놀랄 때가 많다.
비할 수는 없겠지만 여름이를 통해 부모님의 마음을 천분의 일, 만 분의 일쯤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분명히 다른 것이겠지만.
여름이에 대한 사랑과 별개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양이와 사는 것을 추천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 존재이지만, 가끔씩 마음이 복잡해진다.
1인 가구인 나와 사는 것이 여름이에게 좋은 환경일까?
척박해도 길거리에서의 자유로운 삶이 이 아이에게 더 나은 삶이 아니었을까?
내가 아닌 다른 상황과 환경의 동거인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나는 내 상황과 환경이 바뀌어도 이 아이를 계속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굳이 슬픈 생각들을 미리 끌어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씩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