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jin Kim Dec 04. 2022

김치, 넌 나의 소울푸드야.

외할머니의 추억

"네? 포기김치가 없다고요?"


싱가포르에서 한국 음식은 꽤 인기가 많아 동네 마트에 가도 김치가 있다. 문제는 맛김치는 있는데 포기김치가 없다는 것이다. 동네 마트라서 그런가 해서 한국 마트에 갔는데, 포기김치가 요즘 안 들어온다고 했다. 이럴 수가. 포기김치를 살 수 없다니, 해외생활 13년째 최대 고비이다. 


해외에 사는 한국 교민들은 해외에 살기 시작하면서 김치를 직접 담가 먹는 경우가 많다. 사는 곳에 따라 김치를 사기 어려워서도 그렇고, 가격이 비싸서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은 매 식사를 한식으로 먹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김치 소비량이 많지는 않아 주로 사 먹었다. 김치를 먹겠다고 직접 담그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아 1kg 정도의 포기김치를 사다 놓고, 꽤 오랫동안 먹는다. 매일 먹는 것은 아니지만 김치는 오래 두고 먹으며 다양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데, 포기김치를 안 팔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이다.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담그던 김치가 갑자기 그리워진다. 그때 제대로 배워뒀어야 하는데 말이다. 


둘째인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직장을 다녔던 엄마를 대신해 우리 집 식사는 언제나 외할머니 담당이었다. 늦은 가을 김장할 때면 집안의 모든 여자가 할머니 대장을 주축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헐머니, 엄마, 언니 그리고 나. 아빠와 남동생은 언제나 이런 집안일에서 제외되었다아니해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번거로운 집안일에서 남자라는 이유로 해방된 것이다어린 마음에도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겐 달리 저항할 힘은 없었다


김장을 하는 날이면 우리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배추의 밑동 부분에 칼집을 내서 반으로 쩍 가르고, 굵은소금에 절여 커다랗고 빨간색의 큰 대야나 욕조에 담아두고, 김치 양념에 들어갈 찹쌀풀도 쑤었다. 할머니는 김칫소에 들어갈 각종 양념을 준비하고, 양념과 함께 버무릴 무도 곱게 채 썰어 두었다. 절인 배추의 물기를 꼭 짠 후 배춧잎을 하나하나 들춰가며 빠알간 양념을 정성스레 발랐다. 할머니는 줄기 부분에 김칫소를 충분히 넣고, 잎 쪽에는 약간의 양념을 묻히라 하셨다. 이것이 김장을 담글 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정이었다. 양념을 묻히고 배추를 반으로 접어 겉잎으로 김칫소가 빠져나오지 않도록 돌돌 싸면 배추는 보자기로 싸 놓은 듯 동그랗고 귀여운 돌덩이 모양이 됐다. 꽁꽁 싸인 돌덩이 같은 배추들을 차곡차곡 보관 용기에 채웠다. 무도 주먹 만하게 썰어 넣었다. 김치가 익으면 아삭아삭한 무김치도 함께 완성됐다. 겨울에 먹는 시원한 무김치는 씹는 소리부터 맛까지 완벽했다. 꽉꽉 채워진 김치 용기들을 보면 절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가족들의 입을 오랫동안 즐겁게 해 줄 기본 음식이 준비된 것이다.

 

김장하는 날의 하이라이트는 김치 겉절이. 할머니가 자투리 김치들을 모아 깨와 참기름을 뿌리고 비벼주면 "아~" 하면서 입을 쩍 벌리고 하나씩 받아먹었다. 할머니의 김치는 젓갈이 별로 들어가지 않아 시원한 맛이 났다. 담백한 김치는 다른 반찬 없이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정도로 맛있었다. 


김치는 김장한 첫날에도 맛있지만, 적당히 잘 익었을 때도 맛있고, 무엇보다 시었을 때는 그 매력이 절정에 달한다. 입맛도 없고, 음식 재료도 마땅치 않을 때는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는다.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하나 얹으면 레스토랑 밥이 부럽지 않다. 스트레스가 쌓인 날이면 캡사이신이 들어있는 매콤한 김치찌개로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도 있다. 날씨가 끄물끄물한 날, 김치전은 또 어떤가? 반찬, 간식, 안주로 손색없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김치전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외국인 손님이 집에 오는 날 김치전이나 두부김치를 내 놓으면 언제나 좋은 칭찬이 돌아왔다. 김치를 싫어하는 사람도 전에 넣은 김치나 볶은 김치는 맛있다며 잘 먹었다. 김치는 요리조리 변신을 시켜도 언제나 맛있는 그야말로 음식계의 팔방미인이다.


해외에 살다 보면 맛있는 한국 음식점이 별로 없어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한식을 떠올리면 언제나 할머니의 음식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김치뿐 만 아니라 된장 꽃게탕, 코다리찜, 고구마순 무침도 잘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스물일곱 살이었을 때 돌아가셨는데,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음식을 배우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끔 친언니와 어린 시절 추억의 음식 얘기를 나누는데 우리보다 더 오랫동안 할머니의 음식을 먹었던 엄마도, 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언니도, 아무도 할머니의 맛을 흉내 낼 수가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포기김치를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지금. 할머니도 그립고, 할머니의 김치도 그립다. 


단아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동네 호랑이 할머니라 불렸던 우리 할머니. 말을 툭툭 내뱉고, 소리를 질러 무서웠지만 밥은 언제나 정성을 다해 따뜻하게 차려준 우리 할머니. 할머니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이 마음에 자리 잡아 김치는 나의 영원한 소울푸드다.



작가의 이전글 행운은 행복에 덧붙은 기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