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γνῶθι σεαυτόν
위 문장은 너무나도 잘 알려지고 누구나 아는 격언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분명 한 번쯤은 들어보기도, 말하기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정말 그 뜻을 알고 계신가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곧 '무지의 지'와 이어집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무지의 지를 잘못 이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무지의 지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야 한다"가 아닙니다. 무지의 지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히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성찰을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정말 전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겸손하라는 교훈도 늘 자아성찰을 하라는 권고도 아닌 그저 묵직한 팩트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이름 석 자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 석 자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이라는 개념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무엇일까요? 주민등록증에 적힌 글자일까요? 만약에 시스템의 오류로, 혹은 행정공무원의 실수로 다른 이름이 적혔다면, 그래도 아직 주민등록증에 적힌 글자가 이름일까요? '주민등록증에 적힌 글자'가 이름의 정의가 아니라면, 부모님이 부르는 방식이 이름일까요? 만약 부모님은 A라고 부르는데 나머지 모든 사람이 B라고 부른다면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요? 애초에 이름이 단 한 가지인가요? A와 B 모두 이름일까요? 실제로 조선 시대에는 이름을 여러 개 사용했으니깐요. 남이 나를 부르는 방식이 이름일까요? 아니면 내가 나를 부르는 방식이 이름인가요?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외국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홍귈덩이라고 부른다면, 홍귈덩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중국은 성조에 따라 단어의 뜻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럼 사투리의 악센트를 섞어서 부르는 내 이름도 내 이름으로 쳐야 할까요? 아니면 본래의 악센트와 다르니 내 이름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이렇게 쭉쭉 가다 보면 결국 이름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럼 결국에는 자신의 이름이 OO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게 되죠.
이게 뭔 말장난인가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토론에서 사용한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용기'라는 주제의 토론이라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용기가 정확히 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버리는 방식으로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라는 명제는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까요? 뭐, 대답은 당연하게도 "알 수가 없다."이겠죠. 그러니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OO는 OO야!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리고 그른지도 알 수는 없겠지만, 늘 자신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 보고, 자신의 신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앎에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겠죠. 사실 모르죠.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요. 오히려 처음 생각한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강조했듯,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리로 가는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앎에 영원히 닿을 수 없습니다. 한없이 근접할 뿐이죠.
하지만 "난 알아!"라고 한다면 더 이상 앎에 근접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 멈춰버리는 겁니다. "난 몰라!"라고 해야지 조금 더 앎에 가까이 근접할 수 있습니다.
"난 알아!"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한계 짓는 겁니다.
"난 몰라!"라고 말한다면 자신과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앎 사이에 놓여 있는 무한한 거리만큼의 성장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