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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Sep 25. 2024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당신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까?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There is no love of life without depair of life.


알베르 카뮈의 작품은 총 세 단계로 나뉘어 있다. 삶에 대한 부정, 긍정, 그리고 사랑. 삶에 대한 부정은 이방인으로 표현했다. 삶에 대한 긍정은 페스트로 표현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인 삶에 대한 사랑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삶에 대한 부조리에 울부짖던 카뮈는 결국 삶에 부조리에 휩쓸려 미처 마지막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따금 과연 카뮈의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외모, 혹은 나에게 하는 행동, 혹은 그 무엇 때문에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정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시간이라는 계절 앞에 놓인 잎사귀다. 투명하고 깨끗한 연둣빛을 내다가, 진한 초록빛을 띄우고, 그러다가 빨갛게 변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속성, 혹은 우리 머릿속에 만들어진 이미지, 환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도 그런 말이 아닐까 싶다. 삶은 부조리하다. 잔인하도록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길을 걷다 날벼락을 맞아 죽을 확률은 같다.


만일 당신이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이유가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라면 당신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 머릿속에 만들어낸 환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은 잔인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그 사실에 절망해야 한다. 그다음에 이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그 존재만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제야 우린 이 세상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다.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부조리한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자살은 꽤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에 대한 완전한 포기이며 부조리로부터 완전한 패배를 당하는 것이다.


이 잔인한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을 사랑해서 죽음을 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 곧 부조리에 대한 투쟁이다.


내가 벼락 맞을 확률과 범죄자가 벼락 맞을 확률은 같지만 그럼에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회에 선을 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굶어 죽고, 총에 맞아 죽고, 기아와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선을 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노력이 아무 의미 없고 부질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노력을 이어나가는 것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을 시간이다.


당신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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