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이 필요한 / 오늘 당신에게 필요한 말
성선설을 주장하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이 쓴 '휴먼 카인드'라는 책에서는 런던 공습에서도 묵묵히 일상을 지켜낸 런던 시민들의 모습이 나온다.
전쟁이 발발하고 공습으로 인해 도시가 파괴된다면,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상점에서 도둑질을 하고 서로 싸우고 약탈하는 상황이 발생할까? 실제로 그런 예시는 인류 역사를 통해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전쟁의 잔혹함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야만적인 본성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런던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들은 놀랍도록 질서를 유지를 했고 또한 전쟁 우울증 같은 심리적, 정신적 피해도 극히 드물었다. 매일 밤 폭격기에서 떨어지는 폭탄과 산산이 조각나는 마을을 보면서도 어떻게 그들은 맨 정신을 유지할 뿐 아니라, 질서와 규칙을 유지하고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바로 그들은 '일상'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매일 밤 폭탄이 떨어져도 아침이 되면 직장인들은 직장으로 출근을 했다. 아이들은 뛰어놀거나 다양한 형태로 교육을 받았다. 지금껏 써온 화폐로 지금껏 다녔던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했으며, 밤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물론 직장이 끝나고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직장인들도 더러 있었다. 심지어는 폐허가 된 건물 지하에서는 클럽이 성행했던 곳도 있었다.
'나니아 연대기' 영화의 처음 장면도 런던 대공습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다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자 황급히 지하 대피소로 도망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간 장면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잤다. 언제 폭격이 시작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이렌 소리가 나기 전까진 본인의 집에서 생활을 한 것이다. 만약에 나라면 모든 물자를 대피소로 옮겨놓고 거기서 생활을 했을 텐데 말이다.
현대에도 유명한 "Kepp Calm and Carry On"(침착하시고 계속해서 일상을 사십시오)이라는 포스터 문구가 만들어진 것도 런던 대공습 때이다.
일상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도대체 어떤 의미이길래 런던 시민들은 전쟁의 혼란에서도 스스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건재함'의 증거이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큰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되면 먼저 일상을 버린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만나던 사람도 만나지 않게 된다. 평소의 수면패턴도 바뀌게 된다. 늘 하던 취미생활도 그만두면서 '지금은 조금 휴식이 필요해'라며 방에 불을 끄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뇌가 스스로를 '특수상황'에 빠져있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실제로 벌어진 상황보다 더욱 안 좋고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나 봐."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일상을 유지해 나아가면, 스스로 위험한 '특수상황'이 아닌 평소처럼 '건재한 상황'으로 인식한다. "흠... 전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있었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잘 지내는 것 보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나 보군"라는 식이다.
가장 흔한 예시로는 '이별'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은 누구에게나 정말 큰 슬픔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이제는 연락조차 할 수 없는 남이 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별을 마주한 대부분의 사람은 하루종일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고, 울고, 술 마시는 등, 평소와는 다른 이상행동을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행동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잔인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최대한 신속히 일상으로 복귀를 해야 한다. 일상으로 복귀를 해야 상처가 회복된다. 술 마시면서 듣는 친한 친구의 위로보다 묵묵히 바쁜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시로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갑자기 몸에 생기가 돋고 몸의 회복도 빨라지는 경험을 한 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병원에서 편하게 누워서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밀려둔 일상을 해나가는 것이 심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회복을 돕는 것이다.
내가 혹시 몇 날 며칠 동안이나 같은 문제로 몸에 기운이 없고 우울한다면, 혹시 내가 내 일상을 잘 지켜내고 있나 돌이켜보자. 혹시 나의 일상이 멈춰있다면 용기를 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평소에는 지겹고 지루한 일상이지만, 일상으로부터 잠시 멀어진 상태에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몸에 생기가 돌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들 것이다.
런던의 시민들이 아침에 일어나 폭격에 무너진 도시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 모든 것이 끝났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출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나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런던 시민들은 "늘 익숙하고 지루했던 나의 일상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구나"라고 다시 느낀 것이다. 실제로 대공습 당시 런던 시민들은 "무너진 건물을 보고 내가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라고 말을 했다.
일상을 지켜낸 런던 시민들은 전쟁조차 물리쳤다. 우리 삶에 전쟁 같은 고난이 찾아온다면,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상'일 수도 있다. 일상은 상처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는 마음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고, 또 가끔은 몸의 상처까지도 회복시켜 주는 만병통치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