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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Feb 11. 2024

데미안으로 보는 허무주의

아브락사스의 의미

고전 명작이라고 하면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데미안은 1919년 발간된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싱클레어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으며 제목인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큰 영향을 준 친구의 이름이다.


데미안은 발간된 지 100년이 지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는 작품이다. 혹자는 데미안이 그저 싱클레어의 상상 속 인물이고, 데미안뿐 아니라 소설 속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싱클레어 자신의 또 다른 자아로 해석하는 해석법도 존재한다. 

헤르만 헤세


뿐만 아니라 데미안, 에바 부인, 아브락사스 등 여러 등장인물이 각자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정해진 해석이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데미안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데미안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니체의 '허무주의'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먼저 데미안에 대한 줄거리를 간략하고 쉽게 요약을 해보겠다.


어느 한 마을에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살았다. 이 소년은 신실한 기독교, 그리고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속한 이 선한 세계와 거리의 부랑자, 주정뱅이, 강도가 있는 어둠의 세계가 있음을 자각한다. 자신이 속하지 못한 어둠의 세계에 큰 매혹을 느낀 싱클레어는 일부러 질이 안 좋은 무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거짓말로 자신의 악행을 지어내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싱클레어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약점이 잡히게 되어 무리의 대장격인 '크로머'에게 협박과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구렁텅이 빠지게 됨을 느끼고 크게 후회하던 싱클레어에게 구원자 '데미안'이 나타나게 된다. 데미안은 순식간에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주게 되고 싱클레어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에서 가인의 이마 증표는 강한 인간이었던 가인에게 신이 부여한 상이라고 하는 등, 학교에서 가르치던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던 데미안을 멀리하게 된다.


데미안은 방학이 끝나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의 학교를 다니게 된다. 하지만 이때 데미안은 술에 빠져사는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고 점차 어둠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중 한 공원에서 이름 모를 소녀를 만나 싱클레어는 강한 이끌림을 느끼고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이 그린 이 아름다운 여성에게 광적인 사랑을 느낀다.


싱클레어는 어느 날 힘차게 위로 날아오르는 매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그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그는 그 그림을 우편에 넣어 데미안에게 보낸다. 데미안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 데미안 -

이후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강한 궁금증을 얻게 되고 이를 알아내려 한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인 것이 바로 '데미안'이다. 물론 여기까지 내용은 책의 중반부 정도가 될 것이다. 이후 데미안은 데미안과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그린 초상화가 바로 에바 부인임을 깨닫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 후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폭탄을 맞은 싱클레어는 군 병원에서 데미안과 다시 재회하지만 데미안이 갑자기 사라지며 소설이 끝이 난다. 


필자가 요약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잘못이 크겠지만 만약 데미안을 보지 않은 사람이 이 요약을 본다면,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의 소설인가?' 싶을 것이다. 그만큼 이해하기가 어려운 소설이 바로 '데미안'이다.


그렇다면 허무주의의 관점으로 데미안을 보았을 때 과연 어떻게 해석을 할 수 있을까?

그전에 먼저 '아브락사스'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브락사스는 영지주의의 최고신격으로 묘사되는 신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하긴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선과 악이 혼합된 존재'로 인지하면 된다. 신과 악마가 합쳐진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데미안은 하나의 세계를 깨고 신과 악마가 합쳐진 존재에게로 날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일까? 우리가 깨야하는 알, 세계는 무엇일까?

데미안의 세계는 이원론적인 세계다.

데미안이 세계는 이원론적인 세계이다. 자신이 태어난 가정,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자 유복하고 행복한 밝은 세계, 선의 세계가 있다. 반면 부랑자가 돌아다니고, 강도가 사람을 해치며, 주정뱅이가 주사를 부리는 악의 세계가 존재한다. 크로머는 '악', 데미안의 가족은 '선', 가인은 '악', 아벨은 '선', 싱클레어의 세계는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는 세계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선과 악 어디에도 명확히 구분되지 못했다. 선의 세계에서 태어났지만 악의 세계에 이끌리고,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선의 세계로 돌아왔다가 어느 순간 다시 악의 세계에 몸을 담는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하고 괴로워하는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말하는 것이다.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어. 그저 너 일 뿐이야."라고 말이다. 니체의 허무주의에서도 같은 주장을 한다. 허무주의는 이 세계에는 정해진 절대적 의미도, 가치도, 권위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저 존재할 뿐인 것이다.


데미안의 후반부에는 이러한 문장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데미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수천 개의 빛나는 별들이. 그 별들은 찬란한 포물선을 그리며 검은 하늘 너머로 휘익 떨어졌다. 별들 중의 하나가 환한 음으로 똑바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 데미안 -


이 문장은 과연 어떤 장면을 묘사하는 것일까? 뭔진 몰라도 분명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세계 1차 대전에서 폭탄이 싱클레어에게 날아오는 장면이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도 거기에서 특정한 의미와 가치를 제거하면 저 위의 문장처럼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위험한 소리인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저 무기가 내 친구와 가족에게 해를 가하면 악이 되고, 같은 무기이어도 적을 공격한다면 나와 친구, 가족들을 지켜주는 선이 되지 않는가? 칭기즈칸이 당시 몽골에게는 영웅이지만, 다른 여러 나라에게는 악마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에게 조차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는 것이다.


니체는 기존 사회를 지배하던 전통적인 도덕체계, 기독교적 윤리구조,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권위 등을 모조리 비판하고 부숴버리는 주장을 했다. 자유론에 의하면 '사회의 시대정신에 거스르는 개인'이고, 허무주의 의하면 '초인', 즉 스스로 기존에 존재하던 그리스도교적 가치, 의미, 권위를 모두 부시고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존재인 것이다.


필자는 이런 면에서 어쩌면 데미안이 '니체' 혹은 '초인'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데미안은 지속적으로 수업 내용으로 나온 성경 이야기에 의문을 품으며, 당시 사회가 정한 가치와 의미를 쫒기보다는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재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너는 네 안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럼 내가 네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알겠니?
- 데미안 -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데미안은 이 말을 남기곤 사라진다. 이 장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데미안이 결국 싱클레어 내면의 존재라고 해석한다. 만약 그렇다면 싱클레어는 밝은 세상의 자아, 데미안은 어두운 세상의 자아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데미안의 이름부터가 악마(Demon)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해당 해석에 설득력이 더해질 것이다.


초인사상이라는 것을 한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자신이 나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혹은 정해진 길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는 것이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내면에 들어오게 되면서 싱클레어는 앞으로 자신이 판단에 따라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선택할 것이다. 밝은 세상의 것만, 혹은 어두운 세상의 것만을 따르는 것이 아닌,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스스로 정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리하자면, 밝은 세상의 싱클레어, 어두운 세상의 싱클레어가 아닌, 오로지 '싱클레어'가 되어가는 여정을 다룬 소설이 '데미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의 상황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싱클레어가 신실한 기독교 집안, 즉 밝은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부랑자, 주정뱅이, 강도가 넘치는 어두운 세상에서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애초에 '싱클레어'가 아니고 '데미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구원해 주는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소설 속 싱클레어와는 달리 기독교적 가치관 (전통적 도덕규범)이 완전히 결여된 사람이 주인공이었다면, 당연히 반대의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그리니 이 소설을 보고, 아하! 전통적인 도덕규범과 선과 악의 경계를 모조리 무시하면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 소설은 무턱 되고 이 세상에 반기를 드는 '데미안'을 따르라!라고 주장하기보다는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적절히 합쳐진, 진정한 '나'를 찾는 소설이다. 


위 해석은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이며 실제 작가가 의도했던 해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숨겨진 철학이 궁금한 자신의 최애 작품을 댓글에 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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