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이구 Feb 25. 2024

죄와 벌로 알아보는 보편적 진리

'신은 죽었다' 이제 어쩌냐.

죄와 벌은 정말 대단한 소설이다. 800페이지가 넘어가는 엄청난 분량 탓에 끝까지 완독을 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꽤나 어렵지만, 소설 자체의 몰입감도 엄청날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 또한 강렬하고 확실하다. 다만, 너무 길어서 필자 본인도 거의 한 달 동안 매달려 읽은 기억이 있다.


죄와 벌은 '신은 죽었다'가 선포되고 난 뒤의 세상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걱정과 우려가 담긴 소설이라고 필자는 해석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 선포 이후 유럽은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고, 그에 따라 사회 전반에 깔려있던 기독교의 윤리의식 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현대사회에서도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회 전반에 깔려있던 기독교적, 혹은 전통적 가치가 흔들린다면 '절대적 도덕률의 부재'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전까지는 '신'이라는 이름 아래에 절대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윤리체계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면서 그전까지는 당연시 여겨오던 절대적 도덕률, 초월적 가치, 용서와 회개가 그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또 부정하는 일이 발생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로 인해 발생할 문제점에 대한 강한 우려를 소설에 담았다.


먼저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청년이다. 돈이 없어 동생이 선물한 소중한 시계마저 한 노파가 운영하는 전당포에 맡길 만큼 돈이 많이 궁한 상태이다. 하지만 전당포를 운영하는 노파 알료나는 괴팍하여 가난한 라스콜니코프 상황을 이용해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물건들을 넘겨받는다. 알료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재산은 축적한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라스콜니코프는 알료나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그런 악한 생각을 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게 된다. 하지만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알뇨냐가 자신의 경계선 지능장애를 겪는 동생을 학대한다는 소문, 그런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 알뇨냐가 홀로 집에 남게 되는 시간대까지 우연히 듣게 된다.


무엇보다 라스콜니코프의 마음을 흔든 이야기는 알료냐를 죽이는 사람은 알료나로 인해 고통받는 그녀의 동생을 포함하여 수백, 수 천명의 사람을 구원해 주는 영웅이 될 것이며, 그 행위는 정의로운 행위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한다.


 

"지금 나의 행위를 막는 것은 전통적인 도덕관념뿐이다. 만약 신이 없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결국 라스콜니코프는 두 손으로 도끼를 들고 노파의 머리를 내려 찍는다.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된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까지 살해한다.


자,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들었을 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라스콜니코프는 정의로운 청년일까? 아니면 그저 살인마에 불과할까?


누군가에게는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던 악당 노파를 처단한 라스콜니코프가 정의의 사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살인자로 보일 것이다.


확실한 건 기독교적인 도덕률, 절대적 도덕률에 의하면 라스콜니코프의 행동은 악행이다. 그가 한 일은 성서에서 명확히 죄로 명시되어 있는 '살인'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파가 착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노파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죄를 저질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 도덕률에 의거하여 봤을 때,  라스콜니코프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라스콜니코프의 생각은 달랐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분류의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범인(凡人, 평범한 사람)과 비범인(非凡人,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다. 범인이란 법의 제약을 받는 사람들로 범행을 저지르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또 벌을 받게 되는 사람이다. 이와 반대로 비범인은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특출한 능력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범인들이 피해를 입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폴레옹


라스콜니코프는 비범인의 예시로 나폴레옹을 들었다. 나폴레옹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나폴레옹의 행위는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된다고 주장했다.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은 상대적 도덕률이다.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에 따른 절대적 도덕률이 아닌, 사람과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도덕률이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 또한 자기 자신을 비범인으로 규정하며 고로 자신이 알료냐와 리자베타를 살해한 것은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사회에 순수한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합리화된다는 것이다.


자,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을 시간이다.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이 옳은가?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이 옳은가?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현대사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예시를 들어보자,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연쇄살인마가 있다. 수 십 명의 사람을 죽였고 앞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사람이 큰 사고를 당해 응급실로 실려왔다고 해보자. 자, 당신이 의사라고 가정했을 때, 그 연쇄살인마를 살려야 할까?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는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이성이 이렇게 아주 어려운 도덕적 상황에서 완벽한 정당성을 가진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이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니코프가 알료냐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죄 없는 그녀의 동생 리자베타까지 살해하게 되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는 완벽한 정당성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는 개인주의와 실용주의가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실용주의를 도덕관에 접목시키는 행위가 과연 올바른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절대적 도덕률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말로는 가이드라인, 그리고 가능하다면 수 천년 간 시대를 초월하여 다수에게 인정받은 증명된 도덕률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장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명제인 '신이 없다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신이 없으니 인간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도 된다는 긍정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정해진 가이드라인이 없어 다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날뛰는 카오스에 대한 우려의 메시지이다.


소설의 후반부, 라스콜니코프는 꿈을 꾼다. 아시아로부터 유럽까지 전염병이 확산되는 꿈이다. 그 병에 걸리게 되면 사람들은 '진리가 오로지 자기에게만 있다고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세상은 파멸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일 모든 사람이 종교로부터, 관습과 전통으로부터 내려져오는 도덕률을 무시하고 각자의 합리성과 이성으로만 도덕적 상황에 대처한다면 결국 파멸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기독교적 가치관(보편적 진리)을 지닌 소냐라는 여성에 의해 라스콜니코프가 결국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갱생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노파 알료나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는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는 도덕적 상황을 의미한다.


그녀의 동생 리자베타의 죽음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완벽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신은 죽었다' 선포 이후 기존의 도덕률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도덕적 상황을 해결하려는 '상대적 도덕률' 혹은 '상대적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소냐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온 보편적 진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절대적 도덕관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을 상징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죄와 벌은 그 분량이 엄청나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분량조절에 약간 실패했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위의 내용은 정말 소설의 10분의 1도 요약하지 못했다. 그만큼 내용이 방대한 소설이다. 


또한 이 글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에 담은 '보편적 진리'의 철학을 설명할 뿐, 뭐가 옳다, 뭐가 틀리다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다.


모든 기본적인 도덕률과 윤리체계가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나온 서양 사회의 특성상 절대적 진리의 흔들림은 곧 사회의 흔들림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우려가 이해가 충분히 된다.


하지만 같은 문제가 동양의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적용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하자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구름 위에 성 짓고 수염 기르는 신이 아닌 '초월적 가치'로 해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라는 명제는 모두가, 혹은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명쾌히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냥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유가 굳이 필요가 없는 '보편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편적 진리는 어떠한 '초월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다. 이를테면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그냥 인간은 특별하기 때문에' 등등이 있다.


죄와 벌에서 예시를 들면, 살인죄라는 법, 혹은 가이드라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나쁜 것이다'라는 보편적 진리에 근거하여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나쁜 것이다'라는 보편적 진리는 '신이 살인은 죄라고 했다'라는 초월적 가치에 의해 정립되었다. 한마디로 초월적 가치가 없다면 법이라는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신이 살인은 죄라고 했다'라는 초월적 가치가 흔들리면 자연스레 '살인은 나쁜 것이다'라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고 각자의 이성과 합리성에 의거해서 '손해보다 이익이 크다면 살인을 해도 괜찮다'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판단하는 점에서 극히 자기중심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실용적인 결론이다. 그리고 그렇게 라스콜니코프는 노파를 살해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초월적 가치가 흔들리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라는 명제에서 '특정 사람은 덜 존중받아야 한다' 혹은 '특정 사람은 더 존중받아야 한다'같이 말이다. 또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아야 하나? 어차피 인간도 동물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심지어는 인간을 그저 사회를 구성하는 부품 중 하나로 인식해버리는 등 사회전반에 깔려있던 기존의 초월적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


신의 존재가 애초에 없었던 동양에서도 '신은 죽었다'.


그로 인해 발생할 문제점이 혹시 있지 않을까? 죄와 벌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라스콜니코프는 자기자신을 '비범인'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해 자신한다. 내가 생각하는 도덕률이 절대적이고 나의 이성과 합리성은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작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자신이 재판장이 된 것 마냥, 혹은 신이 된 것 마냥 판결을 내리고 직접 벌을 준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최대한 강력하고 무자비한 '최고형'을 선고한다. 그 판결이 '실용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가운 사회에 사랑과 동정심이 가득한 따뜻한 '소냐'의 존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더하여 자신을 비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여, 사회의 분극화를 이끌어내진 않았는지도 생각해 보야할 것이다.




이번 글은 유난히 길어졌다.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정말 소설 전체의 10분의 1도 다루지 못했다. 그만큼 죄와 벌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아주 긴 소설이긴 하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읽어봐야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타이밍이 아마 이 글을 읽은 지금이진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리고 만일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죄를 지은 주인공과 그를 사랑으로 구원해 주는 여자의 러브스토리, 혹은 긴장되는 스릴러 장르의 소설로만 읽지 말고 상대적 진리와 보편적 진리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작용되는지, 또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의 사망선고 이후의 사회에 대해 어떠한 걱정을 했는지, 또 그의 걱정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대사회에도 적용이 되는지에 대해 의식하면서 읽으면 안 그래도 방대한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https://brunch.co.kr/@idaigu/44

이 글은 예전에 '죄와 벌'에 관해 작성한 글인데, 혹시 죄와 벌에 대한 내용이 궁금한 사람들은 이 글도 한 번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보편적 진리'와는 또 다른 관점을 다룬다. 



위 해석은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이며 실제 작가가 의도했던 해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숨겨진 철학이 궁금한 자신의 최애 작품을 댓글에 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전 07화 마슐로 보는 자유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