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점은 없다. 잠재력만이 있을 뿐.
이번 '최애로 보는 철학'의 최애 작품은 바로 말 그대로 필자 본인의 최애, '슬램덩크'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보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들어보기는 했을 작품이다. 게다가 약 1년 전쯤에 개봉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한국에서도 큰 흥행에 성공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작품이다.
필자의 '슬램덩크'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조그만 설명 하자면, 만화에서는 단연코 슬램덩크가 나의 최애라고 단언할 수 있고, 문화 콘텐츠 전체로 따져도 적어도 3위 안에는 든다고 장담할 수 있다. 작년,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을 때는 무려 3번이나 혼자서 관람을 하러 갔다. 자막판, 더빙판, 그리고 iMax까지 총 3번을 봤다. 혼자 보러 간 것도 괜히 다른 사람과 같이 보러 가면 혹여나 방해를 받을까 봐 혼자서 오롯이 즐기기 위해 과감하게 혼영(혼자 영화 보기)을 선택했다.
슬램덩크는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접했다.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때부터도 좋아했지만, 제대로 사랑에 빠진 건 군대에서이다. 나는 전역을 약 한 달 앞둔 말년 병장이었고 생활관에 혼자 틀어박혀 슬램덩크 만화책을 몰래 읽기 시작했다. 사실 만화책 반입이 안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복무한 부대가 그렇게 빡빡한 곳도 아니었고 간부들과도 친했을뿐더러 말년이다 보니 그냥 다들 투명인간 취급을 해서 가능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혼자서 슬램덩크를 읽는데 정말 손에 땀이 날 정도로 몰입해서 보았다. 생활관에서 몰래 보다가 나를 찾으면 몰래 보급품 창고에 숨어서 보거나, 후임 생활관에 몰래 숨어서 읽기도 했다. 그렇게 슬램덩크에 빠져버린 나는 주말에는 소대 후임들을 모아 농구를 했고 평일에는 전투휴무를 쓰고 혼자 농구공을 튀기며 농구 연습을 했다. 평소 땀 흘리기를 싫어해 운동이라곤 질색을 하는데 슬램덩크를 읽고 난 후에는 매일매일을 땀으로 샤워를 했다.
지금도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는 슬램덩크의 캐릭터들을 떠올리며 열정을 되찾곤 한다. '자기 계발서를 읽지 말고 슬램덩크를 봐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나의 슬램덩크 사랑이야기가 길어졌다. 사실 슬램덩크를 주제로 하면 나는 몇 편이고 글을 계속 쓸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주제인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그 어느 철학에도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슬램덩크를 안 본 사람들을 위해 잠깐 줄거리 설명을 해주자면, 북산고교라는 농구부가 그다지 유명하지 않는 학교에서 포인트 가드 송태섭, 슈팅가드 정대만, 스몰 포워드 서태웅, 파워 포워드이자 주인공인 강백호, 그리고 센터이자 주장인 채치수가 팀을 이루어 전국대회를 목표로 농구를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화이다.
등장인물들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보겠다.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이자 북산고의 포인트 가드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170cm가 안 되는 작은 키 대신 현란한 드리블로 공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허세가 심하고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향이 있다. 만화 내에서도 강백호와 정대만과 주먹다툼을 한 적이 있고 작중에서도 '문제아'라고 언급된다.
중학교 농구부에서는 단연 MVP로 인정받으며 지역에서 넘버원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채치수를 향한 라이벌 의식과 평소 자신이 존경하던 안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무리한 플레이를 하다가 얻은 무릎부상을 계기로 탈선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뒤로는 폭주족과 어울려 다니며 본격적으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닌다. 심지어는 자신의 패거리를 이끌고 농구부로 쳐들어가 농구부원들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농구실력도 외모도 뛰어난 북산고의 에이스이다. 특히 주인공인 강백호가 라이벌이라고 의식하는 인물이다. 정작 본인은 그다지 강백호를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뛰어난 실력을 과신하는 성향을 보이며 남에게 패스를 하는 팀플레이보다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독단적인 플레이를 한다. 약팀을 상대로는 이러한 플레이 방식이 잘 먹히지만, 강팀을 만날 때마다 팀을 고전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슬램덩크의 주인공이다. 189cm라는 큰 키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자신의 재능을 운동에 사용하지 않고 싸움에 사용하는 불량아다. 그리고 늘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으로 팀의 사기를 올릴 때도 있었지만 늘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화려한 플레이만을 추구하며 기본기는 물론, 농구경기의 룰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연달아 실수를 남발한다.
게다가 한번 자신감이 무너지자 상당히 소극적인 플레이와 지속적인 실수로 팀을 위기에 여러 번 빠트리는 모습도 보인다.
북산고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라고도 할 수 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북산고 농구부를 지킨 존재이며 농구로 유명하지 않은 학교에서도 늘 전국대회 제패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팀원들에게 잔소리가 심하고 무조건 정석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식의 약간 FM 스러우면서 독불장군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어 동료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슬램덩크의 등장인물의 간략한 소개이다. 설명으로만 보면, 문제아, 양아치, 나르시시스트, 불량아, 독불장군의 모임이다. 농구로 유명하지도 않은 북산고에서 어떻게 이런 문제아들만 모아둔 농구부가 어떻게 전국대회에 도전을 할 수 있을까?
이들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잠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혹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저작물이자 서양 최초의 자기계발서라고 일컬어지는 책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니코마스코스 윤리학의 목적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이다. 이때 행복에 사용된 단어는 에우다니모니아(Eudaimonia)인데 이 단어는 우리가 평소에 쓰는 '행복'과는 살짝 뜻이 다르다. 행복보다는 오히려 '잘 사는 것'에 그 의미가 가깝다. 뭐 잘 살아야 행복할 테니 그게 그거일 수 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이 무엇일까? 연필을 생각해 보자. 한 연필을 그냥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연필이다. 휘리릭하고 종이에 휘갈기면 스르륵하고 글씨가 써진다. 반면 다른 연필을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심의 상태가 안 좋다거나 겉에 가시가 튀어나와 있다고 해보자. 이 연필로는 글씨를 잘 쓰기란 어려울 것이다. 전자의 연필을 A, 후자의 연필을 B라고 했을 때,
A 연필을 '종이에 글씨를 쓴다'라는 연필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즉 연필로써의 에우다니모니아를 잘 수행하고 있다.
반면, B 연필은 '종이에 글씨를 쓴다'라는 연필의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 즉 연필로써의 에우다니모니아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시켰다. 즉, 인간으로서의 기능,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능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 인간의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미덕' (virtue)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 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늘의 주제인 '중용'을 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 멀리 돌아왔다. 오늘의 주제, '중용',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중용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비겁과 무모함의 중간인 미덕, '용기'가 있다. 불의에 대한 무시와 불의에 대한 굴복 사이에 '정의'라는 미덕이 있다. 한마디로 과유불급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중용을 통해 미덕을 실천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인간으로서 잘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아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되게 뻔한 이야기다. 뭐든지 지나치면 안 좋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우리에게 '단점'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게 도대체 중용이랑 뭔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타고난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 선천적으로, 혹은 자라온 환경에 따라 누군가는 겁이 많을 수도 있다. 반대로 아주 무모한 사람도 있다. 지나치게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 등등 우리는 각자 타고난 성질이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부분을 위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 마치 MBTI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T, 누군가는 F. 누군가는 E, 누군가는 I. 이런 식으로 자신의 타고난 성질도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그리고는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며 자신을 한계 짓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외친다. 중간이 있다는 것이다. 비겁과 무모함 중간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성질은 이분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장단점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바라보면 단점은 180도 바뀌어야 할, 고쳐야 할 문제점이다. 하지만 스펙트럼에서 바라보면 단점은 조금만 잘 다듬으면 흔히 말하는 포텐이 터지는 잠재력이 되는 것이다.
겁쟁이는 조금만 무모해지면 된다. 무모한 사람은 조금만 신중해지면 된다. 그러면 중간지점인 '용기'라는 미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발전하는 것이다. 겁쟁이가, 무모한 사람이 자신을 한계 짓던 그 한계점, 단점이 순식간에 발전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잠재력'이 되는 것이다.
모든지 생각하기 나름이다. 자신의 성질을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잠재력'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단점과 잠재력의 차이는 또 있다. 잠재력을 개방하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건 어쩔 수 없는 내 단점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나에게는 이러한 잠재력이 있어. 이걸 개방하면 난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슬램덩크로 돌아와서, 이 문제덩어리 북산고 농구부는 전국최강 '산왕공고'와 맞붙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산왕공고의 압도적인 승리를 점쳤다. 만약 북산고가 자신들의 잠재력을 개방하지 못했더라면 상대도 되지 않고 더블스코어가 났을 것이다.
주인공 강백호는 지나친 자만심과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팀원들은 늘 강백호를 인정해주지 않고 패스조차 잘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강백호는 오히려 더욱더 큰 자기 과신과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산왕전 때, 강백호는 비로소 감독과 팀원으로부터 '기대'를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순간 강백호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서 어른스러운 책임감을, 지나친 자만심에서 건전한 자신감을 얻게 된다.
자신의 어린아이 같이 라이벌이라며 억지로 무시한 서태웅에게 패스를 하고 지나친 자만심에서 비롯된 '덩크'와 같은 화려한 플레이가 아닌, 자신이 수많은 시간을 투자에 쌓아 올린 건전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정석적인 점프슛으로 팀을 승리로 이끈다.
강백호만이 아니다. 허세만 가득했던 문제아 송태섭은 넘버원 가드 이명헌과의 매치업으로 인해 멘털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허세가 가짜에 불과했다는 것이 탄로 나는 장면이다. 하지만 매니저 이한나의 응원으로 송태섭은 허세와 조급함 중간의 여유와 침착을 얻게 되며 불리한 경기 속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팀을 안심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에 북산고의 파이팅 구호를 송태섭이 한 이유도 이러한 부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은 의외로 슬램덩크 내에서 유일하게 '포기'를 한 인물이다. 중학교 MVP이었지만 고등학교에서 만난 채치수의 존재를 의식해 무리한 플레이를 하다가 결국 부상을 입었다. 회복을 해야 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연습을 하다가 결국 부상이 심해지게 된다. 이는 포기를 안 하는 정신이 아닌 지나친 집착이었다. 결국 자신이 빠진 팀에서 팀을 이끌며 경기를 하는 채치수를 바라보다 결국 농구를 포기해 버린 인물이다.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팀에서 서운함을 느낀 게 아닐까 싶다. 중학교 MVP인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 서러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대만은 방황의 길을 걷다 다시 농구부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지나친 집착과 쉽게 포기해 버리는 마음의 중간인 건전한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얻게 된다. 또한 송태섭에게 '나를 활용해라'라는 대사를 한다. 중학교 MVP이자 늘 주인공이길 바랐던 정대만이 이제는 팀을 위한 도구로써 활용될 각오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활용조차 자신이 의식했던 '채치수'의 스크린을 통해서 받게 된다. 정대만은 산왕전에서 최다득점을 한 선수가 된다.
서태웅또한 자기중심적인 플레이에서 팀원을 믿고 패스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팀원을 향한 불신도 있었겠지만, 서태웅은 경기에서 승리하고자하는 '승부욕'이 아주 강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승리하기 위해 자신이 더 무리해서라도 득점을 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서태웅이 승부에서 이기기위해선 여러가지 선택지가 있음을 깨닫고 게임을 이기고자하는 승부욕을 통해 자신의 개인플레이를 내려놓고 팀플레이를 선택한다. 이 또한 승리에 향한 지나친 집착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한다는 중압갑을 지니는 서태웅이 건전한 승부욕을 통해 팀플레이를 배운 모습이다.
채치수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혼자서 팀을 이끌어야 했던 존재로 어쩔 수 없이 독불장군 같은 캐릭터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채치수에게 '넌 가자미다. 진흙투성이가 되어라'라는 변덕규의 조언을 듣고는 "내가 안 되더라도 북산에는 저 녀석들이 있다. 내가 저 녀석들의 재능을 발휘시켜 주면 된다. 그 역할을 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독불장군 채치수가 자신의 방식에 팀원들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닌 팀원들이 그들의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서포트를 해주는 순간이다.
북산고의 성장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그들이 180도 바뀐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단점에서 장점으로 바뀐 것이라면 180도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단점을 활용했다. 말하자면 90도만 바뀌었다. 지나친 자만심에서 자신감, 지나친 허세에서 여유, 지나친 집착에서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고쳐야 할 단점이 아니라, 다듬어야 할 잠재력이었다. 지금 당장에는 나의 단점, 한계점처럼 보이지만 중용이라는 스펙트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금만 다듬으면 될 잠재력이었던 것이다.
슬램덩크는 정말 명작이다. 각 캐릭터들의 서사, 경기의 흐름, 대사와 그림체 어느 하나 눈을 뗄 수가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단점들을 활용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해 분석하면서 읽으면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으리라 장담한다.
위 해석은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이며 실제 작가가 의도했던 해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숨겨진 철학이 궁금한 자신의 최애 작품을 댓글에 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