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상을 마주한 우리의 반응
이방인은 알베르 카뮈의 첫 소설이자, 단숨에 그를 당대의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그 유명세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서점에 가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방인의 책을 읽어보진 않아도 이 제목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이 소설의 첫 문장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나. 잘 모르겠다.
이 첫 문장이 바로 알베르 카뮈의 철학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부조리'에 대해 잘 설명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정말 선하게 살아온 사람이 병에 걸려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거나, 반대로 정말 악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를 누리다 평화롭게 생을 마감할 때이다. 혹은 정말 열심히 노력한 운동선수가 어이없는 부상으로 시합에 출전조차 하지 못하거나, 남을 도와주었는데 도리어 욕을 먹은 경험,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평소 놀고먹고 하는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얻은 경험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늘도 무심하지'라는 마음이 드는 상황들이다.
정말 간단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맑은 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벼락을 맞은 사람이 평소 아주 못된 행동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천벌 받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평소 저렇게 악행을 저지르니 당연히 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그 날벼락을 정말 선한 사람이 맞았다고 생각해 보자. 이러면 잘 상상이 안될 테니 주변에 가장 선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떠올려보아라. 그리고 그 사람이 맑은 날에 걸어가다가 벼락을 맞았다고 상상해 보자.
상상해 보았는가? 그 감정이 바로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감'이다.
'어째서?' 평소 저렇게 착하게 사는 사람이 왜 날벼락을 맞았지?라는 의문이 들고 배신감이 들것이다. 하지만 배신감이 들 이유가 전혀 없다. 벼락은 그냥 치는 것이고 우연히 그 자리에 악인이 서있으면 악인이 벼락을 맞는 것이고 선인이 서있으면 선인이 벼락을 맞는 것이다. 착한 사람은 갑자기 절연 방어막이 생겨서 벼락을 막아주고 그런 일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착한 사람은 날벼락 맞을 일이 없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지는 않더라도, 그러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자연의 순리라고 희망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의미 따윈 존재하지 않고 그저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내용일 수 있다. 내 브런치 글들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질리도록 들었을 실존주의, 허무주의의 전제이다.
'모든 것에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다른 곳에 적용시켜 보자. 결혼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왜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성생활을 해야 하는가? 사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미덕이지 않는가? 살인은 왜 하면 안 되는가? 불법이기 때문에? 그 법, 인간이 만들어낸 거이지 않는가? 도덕? 그것도 마찬가지이지 않는가? 어머니의 죽음에 왜 슬퍼해야 하는가? 가족이라서? 가족이라는 단위, 그게 의미가 있나? 그리고 어차피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걸 알고 있지 않는가? 어차피 스포 당한 결말, 별 감흥 없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이러한 의미의 부재를 겪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는 청혼을 하는 연인에게도 미적지근하게 반응하고, 햇빛이 눈 부시다는 이유에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고, 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나.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 세상의 모든 관습, 제도, 법, 가치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을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통상적으로 '이방인'의 해설집이라 평가받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대서라도 해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친근한 세계이다. 그에 반해, 갑자기 빛과 환상이 사라진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은 이방인 되었다고 느낀다. 이런 추방이 절망적인 까닭은, 이젠 고향을 잃어버려 더 이상 고향을 추억할 수도, 약속된 땅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뫼르소는 오히려 죽음 앞에서 희열과 행복을 느끼며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이방인'의 플롯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베르 카뮈의 철학에 대해 오해를 한다. 마치 "이 세상은 의미가 없고 그렇기에 살아갈 이유도 없다!"라고 외치는 청소년 수준의 미성숙한 철학으로 말이다.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단 한 가지 진실을 이야기한다. '이 세상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진실을 깨달은 사람은 마치 뫼르소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이방인'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사실 자신의 소설 세계를 부조리에 대한 3단계 태도로 나누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부정-긍정-사랑이다. 이방인은 첫 단계인 '부정'에 해당하는 소설이며, 페스트는 긍정에 해당한다. 안타깝게도 알베르 카뮈가 교통사고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사랑에 해당하는 소설은 출판되지 못했다.
다시 돌아와 설명하자면, 뫼르소의 부조리에 대한 태도는 1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시지프의 신화' 첫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만일 세상에 살아갈 의미가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이다. 뫼르소처럼 죽음 앞에서야 우리는 희열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일까?
카뮈의 대답은 "이 세상에는 살아갈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이다. 이를테면 부조리에 대한 투쟁이다.
이 이상의 논의는 '이방인'에 넘어서는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자.
위와 같은 정보에 입각해서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생애에 공감할지 비판할지, 또한 그에게 혐오감이 느껴지는지, 동정심이 드는지, 어떤 감정이 드는지 등, 알베르 카뮈의 예리하고 끈적한 문체를 통해 부조리를 마주한 개인의 감정과 심리 상태를 느끼고 깊게 사색하면서 읽어보길 바란다.
위 해석은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이며 실제 작가가 의도했던 해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숨겨진 철학이 궁금한 자신의 최애 작품을 댓글에 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