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냥 믿어야 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리뷰를 보았다. 반응은 극과 극을 달렸다. 한쪽에서는 '역시 믿고 보는 무라카미 하루키, 재밌게 읽었습니다.' '심오하고 하루키 특유의 세계관에 빠졌습니다' 등의 반응이었고 반대쪽은 '최악의 소설' '하루키 작품 중 최악'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와 같은 반응이었다.
리뷰들을 살펴본 결과 어느 쪽이건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명확한 해석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끝까지 읽고 무언가 멍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모든게 뭉뜬 그려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무엇을 향한 여정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누군가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다.
둘째, 주인공은 '성관계'를 맺지 못한다.
셋째, 현상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넷째, 목적이 불분명한 의식.
나는 이 책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주인공 '나'와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환상 속 도시가 벽으로 둘러쳐져 있는 이유를 '역병을 막기 위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인공은 묻는다.
"혹시, 영혼이 앓는 역병 같은 것일까?"
그리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인다.
'영혼이 앓는 역병'이라고 하자 나는 즉시 키르케고르가 떠올랐다. 그리고 소설의 많은 부분이 퍼즐 맞춰지듯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소설은 어떤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도시는 주인공과 주인공이 학창 시절 사랑했던 '너'가 함께 만들어낸 상상 속 도시이다. 그 도시는 벽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그 도시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벽은 '영혼이 앓는 역병'으로부터 도시 내부를 지킨다.
영혼이 앓는 역병이라면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떠오른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보다는 영혼의 죽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물론 '자살'로 이한 육체적 죽음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자살 또한 영혼의 죽음으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절망은 무엇일까? 소설의 내용을 바탕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시계에 바늘이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유령 고마쓰 씨(하지만 이 때는 주인공이 고마쓰가 유령인지 모른다.)의 시계에 시침도, 분침도, 초침도 없는 것을 보며 '시공이 일그러지며 뒤틀리는'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이는 벽 안 도시의 시계탑에서도 마찬가지다.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주인공 '나'의 유한한 세상과 시계의 바늘이 없는 무한한 세상이 충돌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을 영원한 속성과 유한한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불안정한 존재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절망은 그 두 세계의 괴리감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간이란 하나의 유한과 무한의 종합,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 자유와 필연의 종합, 요컨대 하나의 종합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인간은 영원한 것을 바라는 시간적 존재이다. 그래서 인생은 늘 양자택일이다. 우리는 두 개 다 원하지만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선택과 동시에 나머지 하나는 사라진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절망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이름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름이 소설에 나오지 않은 인물은 모두 소녀, 나,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리고 카페 사장이 있다. 이들 중 소녀,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리고 나는 벽 안의 도시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벽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름이 나오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카페 사장은 벽 안의 도시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름 없이 '카페 주인'으로 불린다. 카페 주인은 성적 행위에 대한 어려움을 겪었고 그에 대한 자기 방어 수단으로 '갑옷처럼 딱딱한 속옷'으로 몸을 꽉 조이고 있다.
만일 벽이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면 카페 주인의 '갑옷'또한 자신의 '절망'으로부터 세운 일종의 '벽'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 또한 이름 없이 카페 주인으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의 절망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자신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무지, 자신이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것에서 나오는 절망, 자신이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절망. 어쩌면 이들은 자신이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절망에 걸린 탓에 자신의 이름을 저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카페 주인은 위에서 설명했듯 성관계에서 아무런 쾌락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아주 큰 고통만을 느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혼까지 하게 되었고 특별한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설에서 주인공 '나'와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만 성관계는 할 수 없었다.
주인공 '나'는 이러한 경험이 이전에도 있다. 바로 '너' 혹은 '소녀'와의 관계이다. 17살의 '나'는 소녀를 열렬히 사랑했고 성적으로도 그녀를 원했다. 하지만 카페 주인과 마찬가지로 '나'는 소녀와도 어느 정도의 스킨십까지는 가능했지만 그 이상의 것은 할 수 없었다. 둘이 충분히 성숙해지기 전에 '소녀'가 사라진 탓일 수도 있고 '소녀'가 자신을 전부 가지기 위해선 '그 도시'로 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주인공이 계속해서 '성관계'를 맺지 못하는 현상은 키르케고르의 특이한 결혼관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키르케고르는 기본적으로 열정과 성관계를 누리면서 동시에 가정으로써의 안정성과 일상성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양자택일이다. 열정과 성관계, 그리고 안정성과 일상성을 모두 누리는 '완벽한 결혼'은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열정과 성관계를 얻으면 안정성과 일상성을 잃고 안정성과 일상성을 누리려고 한다면 열정과 성관계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기에 '소녀'는 자신의 전부를 얻기 위해선 상상 속의 도시로 가야 한다고 말한 것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이유로 카페 주인과 연인으로써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카페 주인과의 성관계를 포기해야 한다. 카페 주인은 전 결혼 생활에서 둘 다를 얻으려 했지만 결국엔 이혼으로 이어졌으니 이는 키르케고르의 결혼관과 매우 일치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여러 번 일어난다. 일단 환상의 도시 그 자체가 첫 번째이고 유령이 되어 나타난 도서관장이 두 번째이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공 하지 않는다. 주인공조차 처음부터 끝까지 그 도시가 뭔지 정확히 모른다. 유령이 된 도서관장은 스스로도 자신이 왜 유령이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며, 그냥 '눈 떠보니 이렇게 되었다'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설명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 내용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담대하게 이러한 부분을 생략한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안 좋게 평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또한 키르케고르의 철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바로 키르케고르가 주장하는 '신앙'은 다음과 같다.
"To have faith is to lose your mind and to win God" - 죽음의 이르는 병
번역하면 '믿음은 제정신이길 포기하고 대신 신(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당시 기독교계에서 과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했다. 이성적인 이유로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초자연적 존재(영원한 세상)에 대해 이성적인 이유를 찾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벽 안의 도시에 대해서도 이 도시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도시의 주민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이 도시가 유지되는지 등 이성적인 설명을 생략한다. 심지어 주인공 '나'조차 도시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만 그냥 막연히 '설명할 순 없지만 그건 현실이다'라고 믿는다.
유령이 된 고마쓰 씨도 마찬가지로 본인이 왜 유령이 되었는지 어떤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본인조차 모르고 그 누구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 건 필요가 없었다. 고마쓰는 그냥 유령이 되었고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소설에서는 여러 '의식'행위가 나온다. 하지만 그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 한다. 예를 들어, 왜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서 그림자를 떼어내야 하는지, 오래된 꿈 읽기는 왜 해야 하는지 등 도시 안의 여러 행위는 그 이유를 찾기 힘들다. 벽 밖의 현실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도서관의 모든 책을 그리 열정적으로 읽어대는지, 고마쓰 씨는 왜 스커트를 즐겨 입는지 정확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의미를 찾기 힘든 의식은 독자들로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없는 소설'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이 의미를 찾기 힘든 의식은 말 그대로 '의미를 찾기 힘든 의식'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의식행위는 키르케고르의 철학에서도 자주 다뤄진다. 키르케고르는 당시 종교계에서 행해지는 목적이 불분명하고 그 마음을 잃어버린 의식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 그가 당시 종교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순종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제사라는 '의식'에만 집중한 사울을 신이 벌한 것처럼 키르케고르는 중요한 것은 의식이 아닌 마음이며 실제 믿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행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벽 안의 도시에 들어오면 다시는 벽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서는 "그저 마음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나갈 수 있다'라고 한다. 여기서 또 독자들은 실망한다. "뭐야. 완전 설정붕괴잖아?" 하지만 소설은 쓸데없이 웅장하고 복잡한 의식이 아닌 그저 '마음'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
이렇게 키르케고르라는 안경을 통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해 알아보았다. 확실히 그 내용이 불분명하고 명확하지 못한 소설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자체가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내용이 불분명하고 정확한 설명이 없어도 가끔은 그저 그 자체로 믿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성적으로 전혀 희망이 상황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믿어야 할 때가 있고,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매우 비합리적인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영원한 세상과 시간적 세상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 불안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 해석은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이며 실제 작가가 의도했던 해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숨겨진 철학이 궁금한 자신의 최애 작품을 댓글에 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