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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성장 Aug 16. 2023

눈물 젖은 회수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이유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랐다. 그래서 중3 때 진로를 정할 때, 여상을 간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나는 배구로 유명한 송파의 한 여자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혼자 배정되어 간 것은 아니고, 중학교 친구 몇 명과 같이 가게 되어, 우정을 쌓으며 그래도 잘 적응하고 지냈다. 나름 재미있었다.

새벽 6시에 기상해 밥을 후다닥 먹고 6시 반에는 버스를 타야, 등교 시간에 맞게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의 33번 버스! 그 버스는 한 시간에 한번 올 때도 있었고, 차를 놓치면 한 시간가량을 기다려야 탈수 있었다. 버스 때문에 지각을 한 적도 많았고, 기다리느라 시간을 다 허비해서 화가 날 때도 많았다. 그때만 해도, 버스카드로 환승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살림살이가 힘들었던 우리 집은 하루 회수권 2장만 나에게 허락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회수권을 여분으로 들고 다녔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고2 때였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우산마저 소용이 없었던 날이 있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미안하다 하며, 버스를 타고 간지 꽤 시간이 흘렀다. 온몸은 비로 젖었고, 신발 안으로 들어온 빗물 때문에 발가락이 감각이 없을 정도로 시려웠다. 강풍은 점점 세져 나를 패대기치는 것 같았다. 목도리를 아무리 감싸도, 바람은 목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우산은 쓰고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기다린 시간이 한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억울했다.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서러웠고, 비에 홀딱 젖어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다리가 아픈 것도 모두가 다 짜증이 났다. 회수권 한 장에 180원. '나는 180원이 없어서 한 시간도 넘게 이런 날씨에 이러고 있구나'생각을 하니,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올라왔다. 미친년처럼 화가 났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계속 났다. 주먹을 불끈 쥐고, 오늘의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내가 어른이 되면 꼭  나 하나는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소리쳤다.

이런저런 이유에서인지, 시험 기간에는 2-3시간만 잠을 잤다. 몰아치기 공부를 하던지, 뭘 하던지 일단 다음 과목의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공부를 했다. 흔히, 실업계 학생들은 공부를 안 할 거라 생각하는데, 편견은 버려야 한다. 당시 내신 때문에, 일부러 실업계를 와서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도 많았고, 특히 취업을 위해서는 정규과목 외에 일반상식, 주산, 부기, 타자, 워드프로세서 등 각 자격증을 취득하여야 했다.

나름 전교 30% 안에 들면서, 7시까지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하고, 엄마 도시락을 먹고, 학원에 가서 자격증 공부를 했다. 7-8시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면 9시가 넘었다. 학원도 형편상 오래 다닐 수 없어서 빠른 시일 내에 습득하여야 했다. 하루 2개의 도시락과 회수권 2장 그리고 500원. 하루를 연명하는 나의 최소한의 비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3년이었다. 내가 스스로 대견하고 참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 버스정류장을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현재 나는 등 따습고 배부르게  잘 살고 있다. 그때에 비하면 몇천 배, 몇만 배 잘 산다.  

사람이 간사한지라, 그때에 비하면 너무 행복한데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더러 있다. 예전의 기억이 나의 기억이 아닌 듯이 살아가고 있다. 그 3년의 기억이 홀랑~ 날아가 버린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그날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처럼 잘 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의 나의 처절한 결심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 같다. 집안이 어려워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데  버스가 늦게 와 주서 고맙다. 내 마음을 단단하게 단련시켜주어 고맙다. 

나는 출퇴근할 때, 택시만 타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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