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한복판에 커다란 고슴도치가 나타났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코트를 바짝 여며 입은 행인들은 잰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들의 시선은 고슴도치에서 자연스럽게 고슴도치가 들고 있는 판자로 옮겨졌다. 그리고 판자에 쓰인 커다란 글씨를 읽는 순간 누구나 예외 없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FREE HUG.
-어머 저것 봐. 고슴도치가 프리허그래.
그러나 모두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구경만 할 뿐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지나가던 여고생 두 명이 킥킥거리며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고슴도치는 친절하게도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잡아 주었다. 찰칵. 찰칵.
- 따갑지 않아요?
여고생 중 깻잎머리를 한 소녀가 물었다. 고슴도치는 커다란 머리를 과장스럽게 옆으로 흔들었다. 사실 고슴도치의 몸은 스펀지 같은 재질이라 부드러운 편이었다. 고슴도치가 양팔을 활짝 펴자 여고생들은 서로 상대를 앞에 세우며 몸을 뒤로 뺐다. 결국 안경잡이 여학생이 친구에게 떠밀리다시피 고슴도치의 품에 안겼다. 고슴도치가 푹신한 두 팔로 안경잡이의 어깨를 꽉 안아 주자 소녀의 얼굴에 가벼운 홍조가 피었다.
- 야, 열라 따뜻해. 너도 와봐.
안경잡이가 손짓을 하자 남은 깻잎머리도 기다렸다는 듯이 고슴도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수많은 행인들이 차례로 고슴도치의 품에 안겨 보들보들한 가시에 뺨을 비벼댔다.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들은 젊은 커플이 한꺼번에 안겼고 인라인을 타고 다니던 중학생 꼬마는 멋진 묘기를 선보이며 공중점프를 해서 안겼다. 근처 지하도에서 떡을 파시던 할머니는 쑥떡 두 개를 고슴도치 탈 밑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즐거웠다. 고슴도치는 최선을 다해서 끊임없이 달려드는 그들 모두를 성실하게 안아 주었다.
어느새 오후 3시가 넘어 있었다. 그동안 거의 백 명에 가까운 행인들을 안아 주느라 지친 고슴도치는 가로수 밑의 벤치로 가서 무거운 탈을 벗었다. 커다란 탈 밑으로 곱슬머리를 한 평범한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12월 중순인데도 청년의 얼굴의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점심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파진 그는 할머니가 준 쑥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서늘한 눈송이가 청년의 콧등을 간질이며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문득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슴도치 탈을 썼을 때와 사뭇 다른 시선이었다. 그리고 환청처럼 증폭되어 들리는 수군거림.
그의 반대쪽 얼굴은 4분의 3이상이 화상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미 통증이 느껴질 리 없는 오래된 상처건만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그는 아직도 그곳이 화끈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분명한 통증이었다.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화상을 입은 쪽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점점 짙어지는 눈발이 부옇게 시야를 가렸다.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6살배기 꼬마였던 그는 아직 난롯불에 달구어진 주전자가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엄마에게 차를 타 준답시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함부로 그것을 들다가 자신의 얼굴에 쏟은 후에야 놀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엄마가 기겁을 하고 달려와서 맨손으로 뜨거운 물을 닦아냈지만 이미 늦었다.
유난히 길었던 그 겨울이 지나고 아이는 붕대를 풀었다.
아이의 한 쪽 뺨에는 평생 날아가지 않을 커다란 붉은 나방 한 마리가 흉측하게 앉아 있었다.
물도 없이 떡을 씹어 삼킨 청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위에서 곁눈질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송사리 떼처럼 놀라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청년은 고슴도치 탈을 집어 들었다가 잠시 그대로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벤치에 내려놓았다. 청년은 자신의 붉은 반쪽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다시 ‘프리허그’ 판자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지고 명동 밤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계속 내린 눈은 고슴도치의 발 위에 무스처럼 두껍게 쌓여 있었다. 판자를 든 청년은 눈사람처럼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청년이 서 있는 주변엔 하얀 눈이 다이아몬드 모양의 조금만 섬을 이루며 그대로 쌓여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이었다.
하지만 그 바깥쪽에 있는 눈들은 청년을 피해서 좌우로 돌아간 수많은 발걸음에 짓밟혀 흙탕물로 변해 있었다.
청년은 판자를 내리고 추위와 피로로 굳어버린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고 벤치를 향해 걸어갔다. 청년이 걸어 나가면서 찍은 발자국이 하얀 섬에 새겨진 최초의 발자국이었다. 청년은 말없이 지하철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팔랐다.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는 외진 산동네였다. 평지에서도 자기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 지친 고슴도치가 느릿느릿 골목길을 올라갔다. 고슴도치는 한 녹슨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떨껑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고슴도치의 눈에 낡은 슬리퍼를 신은 작은 발이 들어왔다. 고슴도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노파가 되어버린 아이의 엄마가 그곳에 서 있었다.
고슴도치는 판자를 등 뒤로 슬그머니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갑자기 푹신한 감촉을 느낀 고슴도치는 놀라서 판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FREE HUG.
엄마가 그 짧은 팔을 한껏 벌려 고슴도치를 안아 주고 있었다.
엄마의 주름진 손등에도 커다란 붉은 나방이 한 마리 내려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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