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PPT 팁
나는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어린 나이부터 영어 프레젠테이션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전공이니 만큼 영어 발표에서 경쟁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항상 준비에 진심인 편이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영어로 PPT 자료를 준비해 발표한 기회들이 많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게 있다.
사실 한국어 PPT 자료를 만들 때와 영어 PPT 자료를 만들 때 두 문화 간 언어 사용 방식에 있어 아주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우선 전형적인 한국어 PPT 장표를 한 장 보자.
위 장표처럼 한국어로 PPT 자료를 만들 때는 대체로 정보를 명사로 나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긴 문장의 경우도 동사를 명사화해 끝맺음하려는 게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한국어가 모국어인 필자 입장에서도 정보가 단위별로 동사보다 명사로 끝나야 형식이 깔끔하고 포멀한 느낌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로 쓴 PPT 자료를 매칭하듯 영어로 번역하려고 할 때, TO부정사나 동명사 대잔치가 된다. 애초에 한국어 원문이 다 명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어 장표는 어떨까? 다음은 전형적인 영어 PPT 장표이다.
장표 한 장을 한 문장으로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개별 페이스북 이용자는 (-----본문에 나열된 내용)을 포함한 자신의 프로필을 보유 및 업데이트한다.'라는 완전한 문장 하나가 장표 한장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참고로 영어권에서 큰 내용을 한 문장으로 써 정보를 나열하려는 경향은 PPT자료뿐 아니라 계약서, 이메일에도 나타난다.)
한편, 영어로 작성된 이 장표를 한국어로 매칭하듯 번역한다면 한국어 사용자 입장에서는 형식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개별 페이스북 이용자가 보유 및 업데이트하는 (컨텐츠)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본문 내열 나열)'
이렇게 동사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한국어가 오리지널인 PPT 자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 아닌데 모든 장표가 대부분 이렇게 전개가 되기 때문에 한국어 사용자 입장에서는 아마 번역된 자료인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비교해서 보았듯 전반적으로 한국어에서는 포멀한 문서에 내용을 명사화해 집어넣으려는 경향이 있고 영어에서는 완전한 문장으로 풀어내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 발표를 위해 자료를 작성할 때 한국어로 만들고 영어로 번역한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 내용을 '문장으로 풀자'를 의식하고 만들어야 청중인 영어 사용자가 볼 때 정보가 훨씬 편하게 들어올 것이다.
영어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한국어로 PPT 자료를 작성할 때 저렇게 영어 PPT 형식을 취하는 습관을 심심치 않게 보이고, 반면 영어를 잘하지만 국내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영어 자료를 만들 때 여전히 한국 스타일을 취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양측 다 서로 다른 언어 사용에 대해 딱히 의식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글이 반대편의 입장을 들여다볼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