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하루

by idle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떴다. 6시 30분. 아직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스마트폰을 들고 SNS와 메일, 뉴스 등을 차례로 확인하다 몸을 돌렸다. 옆자리가 허전하다. 누가 잠들었던 흔적 없이 평평하게 펴진 이불이 낯설다. 그가 없다. 그는 지금 홀로 여행 중이다.


집에서의 일상은 늘 그렇듯 비슷하다. 그가 없어도 마찬가지다. 커피를 마시고 달리기로 시작하는 하루.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후 거울을 바라보았다. 내 머리가 낯설다. 난 분명 생머리였는데, 물론 조금 부스스하긴 했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 회사를 그만 두기 전까지는 난 스트레이트 혹은 웨이브 파마로 내 머리를 들들 볶았었다. 그런데. 20년 만에 만난 온전한 나의 머리는 생머리가 아닌 곱슬머리가 되어 있었다. 길이가 짧았을 때는 좀 부스스 한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기만 하면 단정하게 정리가 되었다. 묶일 정도로 길어지고 나서는 묶고 다녔다. 제대로 머리를 말리는 게 너무 귀찮아서였다. 이제 머리가 어깨 넘어까지 자랐고. 가을이기도 하니. 나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 머리는 분명한 S컬을 그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쁜 웨이브가 아니라 굵고 거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친 모양이다. 난 다시 머리를 묶었다. 머리카락의 성질도 나이가 들면 변하는 걸까. 낯선 나의 머리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남편 때문일까. 남편의 곱슬머리가 전염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와 카톡으로 하루를 얘기한다. 아침 상을 차리고 그에게 전송했다. 잠시 후 그도 사진을 보내온다. 졌다. 돼지고기 덮밥. 음료까지 해서 3,000원 정도란다. 방콕에서 먹었던 팟타이를 비롯한 맛있는 음식의 맛이 입안을 가득 맴돈다. 아, 그가 부럽다. 뭐 나의 아침도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건강식이니 괜찮다.


왼쪽은 나의 아점. 오른쪽은 그의 아점.


식사 후에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카톡, 그에게서 사진이 전송됐다. 나무가 우거진 카페 사진이다. 스벅이란다. 같은 스벅인데 느낌이 많이 다르다. 다시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부러움은 잠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는지. 저녁에는 뭘 먹을 것인지 같은 사소한 일상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각자의 글쓰기를 응원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왼쪽은 나의 아이패드. 오른쪽은 그의 아이패드. 같은 스벅 다른 느낌.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한다. 오늘은 토마토 리조또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어제부터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레시피를 익혔다. 멀리서 그가 불안해했다.


쌀이 익을까?
엄청 불려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동영상 여러 개 봤는데.
생쌀을 그냥 볶더라고.
물 넣고 한참 저어주기만 하면 돼.
잘되려나...


양파가 있어야 하는데, 그냥 마늘만 넣기로 했다. 스테인리스 냄비를 예열하고 올리브유를 붓고 마늘을 넣었는데... 망했다.. 기름은 사방에 튀었고 마늘은 순식간에 까맣게 타버렸다. 마늘을 먼저 볶다가 쌀을 넣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쌀과 버터도 바로 넣어 버렸다. 쌀이 까맣게 타는 거 같아 충분히 볶지 않은 상태에서 치킨 스톡을 넣은 물까지 부었다. 아무래도 예열을 오래 해서 냄비의 온도가 너무 높은 것 같았다.. 망했다 싶었지만 일단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리조또에서 불맛이 나서 더 맛있을지도 모르잖아.'라는 말도 안 되는 위안을 하며.

물이 조금씩 졸아들자 토마토소스와 바질, 치즈를 넣었고, 10분쯤 후에는 새우와 가지를 넣은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했다. 그리고 5분을 더 저은 후 불을 끄고 그릇에 옮겨 담았다. 마늘이 타서 토마토 리조또의 색이 거무죽죽했다. 이거 먹어도 될까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쟁반에 담은 후 그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그의 답을 기다리며 한입 먹어보는데. 어, 괜찮다. 탄맛이 안 난다. 간도 적당하고, 쌀도 잘 익었다. 어, 맛있네! 잠시 후 그에게 답이 왔다.


오 그럴듯하다.
쌀 잘 익었어?
맛있어! 적당해.
담에 해줄게!
기대할게 ㅋㅋㅋ


기대할게 다음에 ㅋㅋㅋ가 붙은 건 불안함의 표현인 거 같다.

저녁을 먹고 또다시 산책을 한다. 방콕에 있는 그의 일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먹는 음식이 다르고, 풍경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서로가 없을 뿐.

토마토 소스 리조또 만들기

같은 일상을 살 거면 굳이 왜 따로 여행을 가나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일상도 함께와 따로의 느낌은 꽤나 다르다. 함께 일 때는 서로에게 맞추고, 혼자일 때는 온전히 나에게 맞춘 시간을 보낸다. 예를 들면 그런 거다. 그가 있다면 스맨파를 보지 않았을 텐데. 혼자 있을 땐 스맨파를 보는 그런 거. 그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나의 선택을 한다. 그는 아마 방콕에서 좀비 영화를 보고 있을 거다.

혼자인 삶은 조금 더 부지런해지기도 하고, 끝없이 나태해지기도 한다. 같은 일상도 혼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낯설어지고, 다르게 바라보는 건 기분 좋은 자극이 된다.


그가 마사지를 받을 거라며 사진을 보냈다. 아무래도 너무 부럽다. 나도 방콕을 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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