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학원 입학테스트를 치르러 애들을 데리고 갔다. 우리 지역에서 이름 대면 80퍼센트의 학부모들은 알 정도로 유명한 학원이었다. 2주 전 입학설명회에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끄덕하며 '역시 유명한 학원이라 체계적이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테스트 신청을 했다.
지금껏 관찰해 온 바에 따르면, 우리 애들은 공부에 탁월한 소질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쉬운 기초 문제를 풀 때를 제외하곤 문제를 읽고 바로 이해를 해서 빠릿빠릿하게 답을 써 내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길거나, 찬찬히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는 문제들은 눈으로 한 번 쓱 훑고 "엄마, 모르겠어요."라는 말이 반자동적으로 튀어나온다. 스스로 공부를 끝마쳤을 때의 성취감이나 더 잘하고자 하는 욕심도 아이들에게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겨우 1학년에게 너무 높은 수준의 인지력과 정의적 영역을 바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나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하지만 문제의 '엄마 친구 딸'이 옆에 있다, 아니 '엄마 친구 딸'과 비교하는 내가 문제겠지. 비교가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하며 덧없는 것인지 누군들 모르겠는가. 하지만 우리 애들은 손도 못 대는 최상위 문제를 풀어내고, 벌써 공부에 욕심부리고 스스로 열심히 하려는 친구 딸내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 애들이 부족해 보이고, 조급한 마음까지 들어버린다. 아 그 친구와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것인가.
전형적인 '엄친딸'과의 전형적인 비교를 하는 엄마가 옆에 있었다. 안 그래도 어려워 죽겠는 공부 시간에 엄마의 고성과 윽박지르는 소리가 난무했으니, 애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아마 내 입을 틀어막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공부방을 뛰쳐나가고 싶었겠지. 그 충동을 감내하고 묵묵히 문제를 푼 우리 아들들에게 새삼 감사해진다.
테스트 전 날, 아이들에게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일단 넘어가고, 모든 문제를 꼼꼼히 읽고 풀라는 당부를 하며 잘 보면 좋아하는 키링을 하나씩 사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다음날 테스트를 테스트를 보러 갔다. 30문제를 아이들은 40분 만에 풀고 나왔다. 문제가 쉬웠나? 아니면 그들이 문제를 포기할 정도로 어려웠나? 아리송한 마음으로 테스트 결과 상담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상담받을 차례는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선생님 손에 이끌려 한번 더 시험장에 들어가서 문제를 다시 풀고 나왔다. 뭔가 싸한 느낌이 왔다. 초조한 마음으로 상담 차례를 기다렸다. 엄마의 이 두근대는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아이들은 몇 점 받으면 키링을 사줄 거냐는 말만 반복했다. 그래, 너희들은 키링을 받고 싶어서 시험을 보러 이곳에 온 것이구나. 이런 순진무구한 녀석들.
드디어 우리 아이들 이름을 원장님이 호명했다. 원장님을 따라 들어간 후, 원장님과 나의 대화.
"지금 풀고 있는 최상위 문제집 말고 다른 문제집을 풀어봤나요?"
"만점왕 풀었어요."
"만점왕은 어떻게 좀 잘 풀던가요?"
학원 로비에서의 싸한 예감은 상담실에 들어온 후 원장님과 주고받은 세 마디의 대화로 거의 확신에 가까워졌다. 시험지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둘째는 단순한 연산도 풀지 못하고 시험지를 제출했다. 수준이 이 정도는 아닌데. 처음 보는 테스트라 긴장했나, 글씨가 너무 작아서 보기가 힘들었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문제를 보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을까, 온갖 추측을 하며 귀로는 시험지 결과를 분석해 주는 원장님의 말을 들었다.
"지금 최상위 수학을 풀 상황이 아닙니다. 기본 편을 다시 푼 후 한 달 후에 다시 시험을 보죠."
이 콧대 높은 학원은 '니 아들 실력이 한참 부족하니 지금 이 상태로는 못 받아주겠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의 치욕과 느낄 필요 없는 부끄러움, 민망함, 어떻게 다시 공부를 시켜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 한 달 후 시험에서 또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나는 둥둥 떠다니는 잡념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상담실을 나온 후 신기하게도 아이들 얼굴을 봤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나도 최선을 다했고, 아이들도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후의 테스트를 다시 예약하고 학원을 나와 고생한 아이들에게 키링을 사주고, 꿋꿋하게 다시 기본 편 문제집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집에 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돼지 목살을 구워주고, 따뜻한 콩나물 국을 끓여 주었다. 아이들 마음을 음식으로 토닥여 주었다. 이 거만한 학원 때문에 나와 우리 아이들이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면 다시 도전하지 뭐, 학원 너네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학원 시험을 보고 나서 애들보다 내가 더 많이 깨달은 것 같다. 나나 아이들이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 그 상황을 관조하면서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억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순간 삐걱대고, 몸과 마음에 무리가 간다. 이는 내가 성장해 오면서 느끼고 버거워하다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이들에게 현명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성적과 결과 때문에 부모님이 아이에게 압박을 가한다면, 그리하여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좋지 않아 진다면 아이들은 마음의 중심과 안정을 잃고 더 흔들린다. 최상위 문제를 왜 이해 못 하냐고 역정을 내던 나를 반추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원 숙제를 베껴서 해간다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 점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네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약속이자 순리임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고 머리에 스미도록 해야 한다. 공부와 노력에 타협은 없다. 유난히 공부를 힘들어하는 날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끼로 유인책을 써보자. 아이들은 단순해서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설명해 줘도 납득하기 힘들다. 그 시간에 공부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임을 조곤 조곤, 때로는 강하게 언급해 줄 필요가 있다. 공부에 타협을 하는 순간 부모는 힘들어진다.
저학년 때는 부모님의 도움도 필요하며, 대부분 유용하다. 아직 공부의 틀과 습관이 잡혀 있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옆에 앉아 책을 보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같이 영어 단어를 외우다가 아이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구원투수로 나서 준다. 이때 핸드폰을 하고 싶겠지만 나도 그것만은 애를 써서 참는다.
최선을 다하되 이미 떠난 기차보고는 오라이 하지 말자. 의미 없고 부질없는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