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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두 Jan 30. 2024

당일 입실인데 페인트칠을 했다고?

 지난 금요일 오후, 우리 가족은 캐리어 4개를 끌고 대전 1호선 지하철에 올라탔다. 23시 10분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였다. 퇴근 시간 복잡한 인파에 떠밀리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가뜩이나 들뜬 아이들 2명과 짐 4개를 지닌 보호자 두 명은 이미 어느 정도 지쳐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정은 시작이다. 대전역에서 서울역으로의 첫 관문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기차가 오지 않는다. 한파에 철로 결로 현상으로 저속운행을 한단다. 열차를 이토록 애타게 기다려 본 적은 없었다. 예상보다 15분 늦게 서울역에 도착한 일행 4명은 잰걸음으로 공항철도 대합실을 찾았다. 20시 15분 출발 열차인데 20시에 대합실에 도착. 티켓 QR코드를 어서 찍고 승강장으로 이동하고 싶은데 우리의 여유로운 쌍둥이 아버지는 유유히 화장실을 다녀오시겠단다. 불안과 조급이 남편보다 더 강한 나는 애써 마음을 다스린다. 그래, '15분이나' 남았으니.

 

 무사히 공항철도 직행열차를 타고 인천공항 제2 터미널에 도착했다. 밤 9시라 그런지 한산했다. 때아닌 반팔과 여름용 긴바지로 갈아입는다. 우리만의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짐을 부치니 마음의 짐도 가벼워졌다. 그런데 우리의 여유로운 쌍둥이 아버지는 저녁을 제대로 못 먹은 아이들에게 의자에 앉아서 빵을 먹으라고 한다. 출국심사와 보안 검색을 부지런히 마쳐 탑승구 앞에 미리 앉아 있고 싶은 나와 또 엇갈린다. 여유로운 남편과 세상 신난 아이들을 데리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보안검색을 하는 도중 직원이 나의 가방을 열어야겠다고 한다. 뭐지? 걸릴 게 없는데. 길쭉하고 얇은 코바늘 때문인가? 알고 보니 100ml가 넘는 치약은 기내반입이 불가하다네. 아까운 새 치약을 휴지통에 버리고 입국심사를 무사히 마친 뒤 탑승구를 찾아 앉았다. 비로소 조급했던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다. 앉아서 네 가족이 셀카도 찍고,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도 훌쩍거리고. 가족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통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항공기를 보며 설레는 마음을 한껏 부풀린다. 이때 남편이 자신에 대해 통달한 듯 미소 지으며 하는 한마디.


 "나는 아무래도 해외여행 체질은 아닌 것 같아."


 공항까지 오기까지의 여정이 너무 번거롭단다. 남편 왈 “지하철역에서 기차를 갈아타 서울역까지 와서 공항철도 기차를 또 타고, 공항에 와서 할 건 또 왜 이리 많은지.”

 발상을 전환해 보니 이 모든 과정이 귀찮고 힘들고 지칠 수도 있을 법 했다. 다 사서하는 고생이니. 필수적으로 가야하는 해외 출장이나 남들 많이 가는 해외 신혼여행 말고는 공항을 찾지 않은 이유도 알 듯했다.  이 모든 과정을 즐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비행기를 타는 과정까지는 그렇다 치고, 해외에 대한 설렘은? 그것도 별로 없단다. 본인은 한국이 좋고, 이 우물 안에서 살고 싶단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될지언정.

'그는 괜히 유교남이 아니었어.'


 조국애로 똘똘 뭉친 남자와 해외여행으로 설렌 세 명은 다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 나름 편하다고 예상한 국적기를 선택했는데도 야간 비행기에서 편하게 잠을 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행기의 좌석 간 앞뒤 간격은 날이 갈수록 좁아지는 느낌이다. 돈 많이 벌어 3년 후 미국 갈 때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서 누워 가는 날을 떠올리며 어렵사리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도착한 후에는 일사천리. 수화물이 짐칸 정면에 때마침 놓여 있었고, 입국심사도 아주 빠르게 끝냈다. 픽업 기사님도 바로 눈에 띄었다. 카톡으로 본 기사님의 사진을 싱가포르에서 보니 지인이라도 되는 양 정말 반가웠다. 공항에서 가족사진 한방 찍고, 차에 올라 탔다. 이제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국경만 넘어가면 끝이다. 앳된 여성 기사님은 거칠고 시원시원하게 차를 몰았다.


 때는 새벽 6시. 이른 아침인데도 국경 인접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언제나 이렇게 막히냐고 물어보니 그렇단다. 그도 그럴 것이 싱가포르 국경에서 여권을 꼼꼼하게 심사받고 나면 다리 건너 말레이시아에서 여권과 모바일 입국 신고서를 확인받아야 한다. 끝인 줄 알았는데 조금 더 가니 불시로 짐 수색까지 한다. 기사님도 처음 있는 일이라며 마약 관련 정보가 입수된 것 같단다. 히잡(Hijab)을 쓴 여성 직원이 무표정으로 갑자기 트렁크를 열어보라더니 구석구석을 만져본다. 불현듯 아이들 비상약이 떠올랐다. 기관지염으로 다량 처방받아온 비상약. 더군다나 가루약인데. 가루약을 마약으로 오인하고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서 심문하거나 감금하거나 구속하면 어쩌지? 뭐라고 해야 하지? 머릿속으로는 이미 소설 한 편을 쓰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나의 새가슴을 애써 다스리고 있는 사이 다행스럽게 트렁크 2개만 확인 후 불시 검문은 끝났다.


 이제는 진짜 호텔에 도착. 시간은 7시 30분. 아뿔싸, 체크인은 오후부터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역시나 체크인은 오후 2시부터였다. 미리 등록을 해 놓으면 방이 일찍 준비가 될 경우 연락을 주겠단다. 진짜 일찍 연락이 올 수도 있다고 믿고 전화기를 수시로 쳐다본 내가 순진했었다. 이따 다시 언급하겠지만 우리는 4시가 다 되어서야 정상적인 호텔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7시간 동안 뭐를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나. 급한 대로 렌터카 업체에게 연락을 해서 일찍 차를 갖고 와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20분이 걸린다고 하는 답을 받고서도 40분 정도는 기다린 것 같다. 말레이시아에서 이틀 살아보니 이 정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인 것 같다. 물론 이때는 모르고 이해를 못 한 채 동동 거렸다.


 만 하루동안 씻지도 못하고, 짐은 호텔 로비에 맡겨놓고 나와 구글 지도를 찾아보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전 세계 어딜 가나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프리미엄 아웃렛 매장에 들러 다음날 입을 아이들의 골프용 폴로 카라 셔츠를 구입했다. 우리나라 폴로 공식 홈페이지에서 99,000원 하는 반팔 셔츠가 말레이시아 아웃렛에선 62,000원이었다. 약 30% 저렴하다. 몸이 피곤하니 다른 곳은 둘러볼 여력도 없이 그냥 돌아왔다. Mr.DIY라는 말레이시아 판 다이소에 들러서 한국에서 미처 갖고 오지 못한 호텔용 슬리퍼도 샀다. 3000원 정도였다.물가는 확실히 우리나라보다 저렴한 편 같다.


 이제 좀 씻고 쉬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시 호텔로 들어가서 입실을 기다렸다. 14시 30분이 넘어갔으니 바로 방 카드를 건네주리라. 그런데 앉아서 5분만 기다리란다. 방이 준비가 되긴 했는데,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나.  아무리 기다려도 부르지 않아 다시 프런트에 갔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한다. 이 나라에선 5분은 15분이 될 수도 있고, 50분이 될 수도 있구나. 다시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호텔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방이 준비가 되긴 했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 오늘 오전 천장에 페인트칠을 한 것 때문에 방에서 냄새가 조금 난다고. 이유를 물어보니 moldy라고 하는데, 이해가 안 돼 What is moldy? 라 되물었다. 그녀는 구글에 'moldy'를 검색해 그 뜻을 한국어로 알려줬다. '지겨운'. 지겨워서 페인트칠을 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매니저는 mold(곰팡이)를 말한 것이었고, 번역기는 어리석게도 moldy를 지겹다고 번역한 것이었다. 허참. 호텔방에 곰팡이가 핀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손님이 묵을 당일 아침에 천장 페인트칠을 하다니.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당 층에 들어서니 복도에서부터 페인트 화학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방문을 열었더니, 이건 뭐 공사 현장에서 날 법한 냄새다. 매니저는 환풍기를 틀어놓고 창문을 열어놓았다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 흔적을 나타내지만, 손님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 방에서는 도저히 머물지 못할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하니 남아 있는 다른 방이 없단다. 임시로 다른 방에 하루 정도 묵을 수는 있지만 다시 여기로 와야 한다나. 2차로 황당했다. 방 크기도 온라인에서 본 것과 차이가 많았다.

호텔비 환불받고 다른 호텔을 알아봐야 하나, 아니면 한 달 살기고 뭐고 다 엎어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 호텔 로비로 내려와 호텔 매니저에게 미처 전달하지 못한 황당함을 담아 제휴 업체에 한국어로 항의 문자를 보냈다.  '지금 두 시간째 입실 못하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방을 받았는데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방이네요. 무작정 이대로 기다려야 하나요?'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자포자기한 상태라 그랬는지 예상보다는 빠르게 느껴졌다. 호텔 직원이 다가와 다른 룸카드를 건넨다. 정말 미안하다며 다른 방을 주겠다며. 일단 다행이다. 방을 안 바꾸고 30일 동안 머물 수 있는 것인지 재차 확인한 후 올라갔다. 조삼모사라는 말이 어울릴까, 워낙 최악인 방을 처음에 봐서 그런지 두 번째 방이 정상인 것이 반가웠다. 여기서라면 어찌어찌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수영장에 가서 수영하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대충 짐을 풀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너무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니 만 하루 동안의 온갖 고생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사실 난 이런 여정을 모험이라 생각하며 반은 즐기는 탐험가 스러운 기질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유럽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품보다는 인도, 몽골에서의 황당하고 어이없었던 순간이 더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디 가서 그런 경험을 해 보겠는가. 예상치 못한 반전, 위기를 겪고 당황함을 느낀 후 그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맛본다. 그 나라의 특성과 문화를 느끼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얻어낸 소중한 방에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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