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명확한 것 같지만 엄청 모호합니다. 법조문의 기본 요소인 용어는 특정 개념과 밀착하다가도 어떤 때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전화(轉化)합니다. 예를 들면, 헌법 제19조의 양심은 주관적이라면서 제103조의 양심은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제15조에는 직업선택의 자유라고 되어 있는데, 헌법해석은 선택만이 아니라 종사 또는 수행까지 포함한다고 합니다. 법의 이념과 가치 그리고 맥락에 따라 변화무쌍하므로 일반인은 물론 법조인도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숙명적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까닭입니다. 법 해석 조작의 기술자들이 판치기 쉬운 환경이다. 권력이 재량으로 포장되며 폭력으로 전화할 위험이 농후하기도 합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사전적으로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들의 명단으로 정의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문화예술인의 명단을 작성하여 다양하게 불이익을 준 사건입니다. 종기가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니라 피부 안에 생긴 염증이 문제이듯, 블랙리스트 사건은 명단의 작성 또는 그에 따른 불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검열을 비롯하여 공공연하게 또는 암묵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예술가에 대한 통제가 문제입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집권 세력이 국가기관, 공공기관 등을 통해 법・제도・정책・프로그램・행정 등의 공적(公的) 수단 또는 강요・회유 등의 비공식적 수단을 동원하여,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정치적 견해가 다른 문화예술인을 사찰・감시・검열・배제・통제・차별하는 등 위헌적이고 위법・부당한 행위를 하여, 문화예술인의 표현 자유와 권리 그리고 시민의 문화 향유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국가범죄”로 정의한 까닭입니다.* 박근혜 정권 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재현될 것이고, 그 방식 중 상당 부분은 정책으로 명명하거나 명단 없이 개별화하여 배제하는 등의 오래된 수법일 것입니다.
헌법이 보호하는 예술의 자유는 미(美)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유와 권리입니다. 크니스(W. Knies)에 따르면, 예술의 개념을 실질적 내용을 기준으로 하여 정의하는 것은 금지됩니다. “예술은 법질서에 선행하는 개념으로서, 그 자체를 일반적․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헌법이 보호하는 예술이 무엇인지 하는 개념 규정은 원칙적으로 예술 행위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릅니다. 예술인이 또는 예술 행위를 하는 시민이 예술이라고 규정하면, 법 또는 공권력은 예술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하고 법을 들이대어 법적으로 재단하지도 못합니다. 예술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가장 근접한 핵심적인 기본권이기 때문입니다.
“입법자가 예술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 법 개념으로서 그 기능상 개별 입법목적에 따라 필요한 ‘상대적인’ 내용을 그 개념에 부여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예술의 자유가 사상·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와 함께 절대적 기본권의 지위에 있는 만큼 헌법 제37조 제2항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이유로 제한하는 경우 명백하고 임박한 위험이 있지 않는 한 제한할 수 없습니다.
국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헌법 제10조 제2문)가 있습니다. 공권력은 법률에서 일일이 예술의 자유 관련 예외 규정을 두고 있지 않아도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예술인을 중심으로 예술계의 판단에 따라 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법률에 예술의 자유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공권력의 무지를 계몽하는 일이 필요하고, 공권력의 남용이 있는 경우 그것을 바로잡는 입법이 필요하며, 예술의 자유를 침해한 법 집행자에게 엄정한 책임추궁이 뒤따라야 합니다. 예술의 자유를 정립하는 과정입니다. 다른 기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윤석열 정권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출발점이었던 이명박 정권 시기 <문화 권력 균형화 전략>(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 2008년 8월 27일 작성)과 유사한 관점에서 문화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때도 그리고 윤석열 정권과 이재명 정권 초기까지 문체부 장관이었던 유인촌은 장관 임명을 반대하는 예술인들을 향해 예술인이 아닌 ‘문화 행동가’라고 지칭했습니다. 순수예술과 정치적으로 오염된 예술이라는 프레임을 덮어 씌워 지원사업, 용역사업, 사전심의제도, 기관 직원이 심사하는 책임 심의제, 사업 규정 등을 통해 ‘정치적 표현’에 대한 검열제도를 강화했습니다.
순수와 정치의 구분은 집회와 시위에서도 익숙한 프레임입니다. 이런 틀에서 시민의 정치는 법적 규율의 대상이 됩니다. 정치는 시민의 몫이 아니라 정치인의 전유물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공화국을 부정하는 인식입니다. 민주공화국에서 정치의 주체는 시민입니다. 정치인은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일부 위임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국회의원 등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주권자가 위임한 일부의 권한을 행사할 책무를 지게 된 것입니다. 임기와 정년 또는 일정한 책임에 따라 그 지위는 심판을 받고, 언제든지 권한을 박탈당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예술은 예술가의 뜻에 따라 예술 행위의 맥락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는 시민의 이해에 따라 정치와 비정치를 넘나듭니다. 종교는 정치의 영역에 개입할 수 없지만, 사상·양심·예술·자유는 폭력의 영역만 아니면 자유롭습니다. 항쟁·저항·혁명의 자유는 예외적으로 폭력의 경계까지 넘나듭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제정한 법률이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아래 “예술인권리보장법”)입니다. 법 제2조 제1호에 따르면, 예술 활동은 인상, 견문, 체험 등을 특정한 형식으로 표현하는 창의적 활동으로서 「문화예술진흥법」 제2조 제1항 제1호에 따른 문화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창작(기획과 비평을 포함한다), 실연(연습과 훈련을 포함한다), 기술지원 등의 활동을 말합니다.
법 제2조 제2호에 따르면, 예술인은 예술 활동을 업(業)으로 하여 국가를 문화적ㆍ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예술 분야에서 창작, 실연(實演), 기술지원 등의 활동을 하는 사람 또는 예술 활동을 업으로 하기 위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교육ㆍ훈련 등을 받았거나 받는 사람입니다. 헌법의 예술가(헌법 제22조 제2항) 개념보다 좁은 개념이다. 이것은 예술지원사업(법 제2조 제4호), 즉 ‘국가기관ㆍ지방자치단체 또는 제6호에 따른 예술지원기관이 예술 활동 또는 예술교육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예산 또는 보조금 등을 지원하는 일체의 사업’ 관련하여 입법목적에 따른 임시적 개념입니다.
예술인권리보장법 제3조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에서 말하는 예술인은 이 법 제2조 제2호의 예술인 개념보다 더 넓게 해석해서 헌법에서 말하는 예술가입니다. 흔히 말하는 ‘직업 예술인’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예를 들면, 법 제3조 제1항의 예술 표현의 자유는 이른바 ‘아마추어 예술인’에게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좁게 해석할 까닭이 없습니다. 국고 지원 관련 사안에서도 다른 예술인과 관계에서 불합리한 차별이 아니라면 예술인의 인정 기준을 엄격하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재일한국인 3세 고규미 씨에게 3~5년 전 지급했던 지원금 600만 원을 환수하라고 통보했습니다. 재단은 고씨가 지원 대상 요건인 ‘국내 거주 내국인’에 해당하지 않는데 지원금을 부당하게 받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국적으로 22년째 한국에 거주하면서 일본 영주권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헌법의 법리에 부합하지 않는 법률의 자의적인 적용이 곧 블랙리스트 사건입니다. 이런 사안을 쌓아가면서 권력은 예술가와 예술 행위를 통제하는 블랙리스트 환경을 조성합니다.
개별법에서 불가피하게 예술 관련 행위를 달리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권력에 대한 입법적 계몽입니다. 입법례 중 하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아래 “집시법”) 제15조다. 학문, 예술, 체육, 종교 등에 관한 집회에는 집시법 제6조부터 제12조까지 규정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집시법 자체가 워낙 악법이어서 그 의미가 퇴색하고 법 집행에서도 유명무실하기는 합니다.
개별법에서 예술 관련 행위를 달리 규정해야 할 사례는 형법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제2장 죄 중 제1절 죄의 성립과 형의 감면에서 예술 행위 관련해서 죄가 성립하지 않거나 형의 감면에 관한 규정을 두어야 합니다. 과거 예술의 자유를 옭아맸던 조항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공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예외 규정을 두어야 합니다.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후진국의 부끄러운 입법이기는 합니다.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죄는 예술 관련 예외를 두기보다는 조항 자체 그리고 법률 자체를 폐지해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안입니다. 아울러 헌법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물론 적정하게 보호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서 죄책을 물어야 합니다. 법 왜곡죄를 도입하는 경우 대표적인 적용 대상이 예술의 자유를 보호하지 않는 법 집행 행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정한 징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률이 필요하다. 예술인권리보장법의 벌칙 조항을 확대해야 합니다.
윤석열 정권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가해자에 대한 복권 조치인 듯 인사권을 행사했습니다. 문체부는 물론 문체부 관료 출신의 회전문·낙하산 인사 그리고 소속 기관과 문화 현장에 대한 위계화, 민·관 협치의 파괴와 지역문화 배제 등을 통해 예술생태계를 파괴했다. 불충분한 과거 청산은 부정의에 부정의를 더할 뿐입니다.
한국 사회는 현대사에서 공권력의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폭력의 경험을 하고도 공권력의 불법행위에 대한 죄책 추궁이 미흡합니다. 이행기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각종 법률에서도 가해자의 처벌과 책임추궁은 없습니다. 진실 규명이 지지부진한 까닭이다.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죄책 추궁을 원칙으로 하고, 가해자에 대해 죄책 감면을 통해 자백을 유도하며, 자백하지 않은 가해자는 시효 없이 죄책을 물어야 공직의 기강이 섭니다. 죄책 추궁의 부재 또는 불충분함은 공권력의 불법성이 되풀이되는 악성 조건입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특별법 제정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과거 청산의 다른 사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특별법에 따른 과거 청산 활동을 바탕으로 문화예술계 관련 법제들을 개혁하는 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아우르는 다양한 차원의 다양한 영역의 법제 개혁이 곧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존엄하고 평등한 삶을 누리는 민주공화국 헌법 체제로의 개혁입니다. 개혁의 상상력이 생장하는 터전은 사상·양심·예술·학문의 자유입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특별법 제정은 이재명 정권이 국민주권정부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3: 블랙리스트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 종합보고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2019.
** 한겨레, 2025. 8. 8.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12381.html>, 검색일: 2025.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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