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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몇 번째 공화국?

by 한량돈오


※ <교토유랑기>에 이어 <그때헌법은> 10월 24일(금) 발행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의 헌법을 개정해서 ‘제7공화국’을 출범해야 한다고 표현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 논리라면 지금은 제6공화국입니다.

지금 헌법이 1987년에 개정한 헌법이고, 87년 헌법에서 출범한 노태우 정권이 ‘제6공화국’이라고 칭한 데서 출발한 듯합니다. 김영삼 정부를 제6공화국 2기 정부라고 부르는 이도 있네요.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는 제6공화국 3기 정부, 노무현 정부는 제6공화국 4기 정부, 이명박 정부는 제6공화국 5기 정부, 박근혜 정부는 제6공화국 6기 정부, 문재인 정부는 제6공화국 7기 정부, 윤석열 정부는 제6공화국 8기 정부, 이재명 정부는 제6공화국 9기 정부인가요?

주요 개헌을 계기로 공화국을 나누는 방식일 듯합니다. 헌법을 개정하면 제7공화국이라고 보는 것이겠지요.


헌법에서 공화국 차수(次數)를 규정한 것은 전두환․노태우 군사 반란 세력이 1980년 헌법의 전문입니다. “제5 민주공화국의 출발에 즈음하여”라는 문구입니다.

통상 언론에서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권을 제1공화국, 1960년 4․19 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을 제2공화국, 1961년 5․16 군사 반란 이후 박정희 정권을 제3공화국, 1972년 유신 내란 이후 박정희 정권을 제4공화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헌법만 바꾼다고 공화국이 바뀌는 걸까요? 예전에는 대통령 바뀐다고 공화국 차수(次數)를 바꿨다고 볼 수도 있죠? 성문헌법의 개정과 다른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80년 군사 반란의 주모자인 노태우가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있을까요?


한국에서 공화국의 순차 문제를 처음 제기한 헌법학자는 국순옥입니다. 저는 당시 박사과정에 합격한 상태였는데요. 1993년 2월 한국공법학회 제34회 학술발표회에서 “공화국의 정치적 상품화와 순차 결정의 과학적 기준”이라는 발제를 들었습니다.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국순옥 선생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헌법학자셨고 지금도 그런데요. 역시 선생님은 다르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은 『민주주의 헌법론』(아카넷, 2015) 483-499쪽에도 실렸는데요. 지금 전문(全文)을 볼 수는 없어서 제가 발췌 메모한 걸 그냥 문장으로 이어 소개하겠습니다.


열악한 물건일수록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이 자본주의 상품 미학의 기본 전략이다. 공화국은 근대 시민혁명에 의하여 특수한 의미가 각인된 고도의 실천적 개념이다. 특히 혁명의 제단 위에서 피의 제전을 치러야 했던 프랑스에서는 공화국이야말로 변혁의 꿈과 향수가 깃든 격정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 평등 우애의 또 다른 이름이며, 민주주의 그 자체다. 국가기구와 국가기관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국가기구가 통치 기구로 기능하려면, 그 구성 부분인 국가기관들이 하나의 행동 통일체로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국가기관들의 조직 형태를 우리는 국가형태라고 부른다.


국순옥 선생님의 문제 제기는 박정희 유신 헌법 체제 또는 전두환․노태우 정부를 공화국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왕정에서 혁명을 통해 공화국으로, 공화국에서 다시 왕정으로 복고하면서 헌법 체제를 구분하기 위해 공화국 차수를 구분했습니다. 공화국의 순차는 실정 헌법의 변화가 아니라 헌법 규범과 헌법현실을 모두 들여다봐야 할 문제입니다. 헌법 체제 관련해서 칼 뢰벤슈타인(Karl Löwenstein)의 정부형태 분류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공화국 순차는 정부형태 변화와도 관련이 있으니까요.


칼 뢰벤슈타인은 우선 정치체제를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 기준은 정치권력을 분권적으로 행사하는가 아니면 집중적으로 행사하는가입니다. 정치체제는 전제주의와 입헌 민주주의로 갈립니다. 양자를 다시 통치유형으로 세분합니다.


전제주의에서는 단 하나의 권력 보유자가 존재합니다. 권력의 범위에서 다른 이데올로기의 경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동의개념으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는 전체주의와 권위주의가 있지만, 양자는 개념상 다릅니다.


권위주의는 유일한 권력 보유자 즉, 독재자, 의회, (혁명) 위원회, 정당 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피치자가 실효적으로 국가의사를 형성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 체제입니다. 다만, 그 범위를 통치구조에 한정함으로써 (공동)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국가와 사회를 구별한다면, 권위주의는 국가 영역에서 작동하고 사회 영역에서의 자율성이 어느 정도 보장됩니다. 권위주의는 법치국가 원칙의 존중과 양립할 수 있으며, 정치권력 자체의 목적의식과 행사에 양립하는 선에서 피치자의 생명과 일반적 자유 그리고 재산권을 보장합니다.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인데요. 예컨대 19세기 독일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제국이 이에 해당합니다.


전체주의는 국가나 집단의 전체를 개인보다 우위에 두고 개인을 집단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지배하는 체제입니다. 국가 전체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질서가 개인의 생활 전체를 통제합니다. 전체주의는 (시민) 사회의 자율성을 허용하지 않고,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 영역을 뒤덮습니다. 대표적인 징후는 사상․예술․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윤석열 정권에서 각종 검열 그리고 그 연결선인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이 헌법적 관점에서 중대한 헌정질서 파괴 행위(자)인 것은 이것이 전체주의적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건도 그렇고요. 최근 극우 세력이 교육계와 종교계를 파고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국가 영역에서 전체주의 정치체제의 통치 기술은 권위주의 체제입니다.


뢰벤슈타인이 전제주의 정치체제의 정부형태로 분류한 것 중 관심 있는 것은 신대통령제(Neopräsidentialismus, neopresidential system)입니다. 신대통령제는 대통령이 국가원수인 동시에 집행부 수반으로서 의회나 사법부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정부형태입니다. 어떠한 국가기관도 대통령의 헌법상 또는 사실상 권력 독점에 대항하거나 그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없습니다. 뢰벤슈타인이 꼽은 예로서는 헝가리에서 호르티 미클로시(Horthy Miklós)의 섭정 체제(1920-1946), 터키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헌법 체제(1923-1938), 바이마르공화국 붕괴 시기의 헌법 체제(1930-1933), 폴란드에서 필수츠키(Jozef K. Pilsudski)의 헌법 체제(1926-1935),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Nasser)의 헌법 체제(1956-1970), 월남(베트남)에서 고 딘 디엠의 헌법 체제(1956-1963), 한국에서 이승만 헌법 체제(1948-1960) 등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박정희 유신 헌법 체제(1972-1979)도 신대통령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이 12․3 비상계엄과 내란을 통해 획책한 것도 국회 없는 신대통령제입니다.


신대통령제는 입헌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아닙니다. 민주공화국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헌법개정 또는 정부형태 변경만으로 공화국 차수가 바뀌지 않습니다. ‘제7공화국’ 운운하는 것이 단지 용어의 문제는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고 정부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 현재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영역에서 극우화 경향을 법으로 규율해서 해소할 수도 없습니다. 일단 현재의 인권과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쉽게 단기간에 법률이나 헌법개정으로 넘길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부터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사회의 영역에서의 역사적 경험을 성찰하고 평화적으로 사안을 풀어가려는 기본적인 약속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헌법적 시야를 넓히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 이미지 라이선스: colorful flag of france with blue white and red color holi paint powder explosion isolated on white background. french tricolore national europe travel and tourism concept. 제작자 stockphoto-graf, 치수 8832 x 3325px, 파일 유형 JPEG, 범주 그래픽 자료, 라이선스 유형 표준


※※ 그밖에 참고할 논문으로는 성낙인, 한국 헌법사에 있어서 공화국의 순차(序數), 「서울대학교 법학」, 제46권 제1호,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05, 134-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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