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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Oct 20. 2020

행복한 사람

2020.10.20.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일도 하고, 제법 시간과 품을 들여 끼니도 손수 만든다. 그러는 사이사이 온전히 나만을 위한 일들을 한다. 글쓰기와 독서모임과 사진찍기와 영화보기이다.

생각해보니 글쓰기와 책읽기는 엄마의 영향이다. 엄마는 전화비를 아끼느라 8절지 종이에 빽빽하게 편지를 써서 막 살림을 난 외동딸에게 보내곤 했다. 주로 아내의 도리, 엄마의 자세 같은 교훈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엄마는 우리 딸이 지혜롭게 잘 하리라 믿는다로 마무리를 했다. 엄마의 그 믿음에 부응하느라 한 번도 삐딱거려보지 못하고 이렇게 바른생활 아줌마가 된 듯하여 억울하다.

사진찍기와 영화보기는 단연 아버지 쪽이다. 아버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얼리어답터였다. 새로 나온 것은 일단 사고 본다. 동네에서 전축도 텔레비전도 우리 집이 제일 먼저 샀었다. 엄마에겐 철없는 남편, 우리에겐 멋진 아빠였다.

아버지는 카메라로 우리 남매들이 자라는 모습을 즐겨 찍었고 당신도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셨다. 중학교때부터 나는 소풍을 갈 때  장롱속 깊숙이 넣어둔 카메라만 가지고 가곤 했다. 학창시절 친구들의 사진은 거의 내가 찍어준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영화광이셨다. 오빠는  꿈이 영화감독이었는데 집안에 딴따라는 안된다는 반대에 부딪혔다. 오빠가 공부를 적당히 했으면 좋았을 걸, 명문 중고등학교에 다녀서 아버지는 공부로 승부를 보고 싶어 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 나는 오빠를 떠올렸다.

내 아래로 남동생이 있어서 아버지는 어린 나를 봐준다는 명분으로 나를 데리고 극장엘 자주 가셨다. 나는 김승호, 김희갑, 허장강, 이예춘, 최무룡, 신영균, 신성일, 도금봉, 최은희, 김지미, 엄앵란을 영화로 알고 있다. 영화를 조기교육을 받은 셈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중간부터 보아도 줄거리를 훤히 따라갈 수 있다.



한나절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나면 나는 영화를 본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영화 하나를 골라놓았다.

빌 어거스트 감독의 <행복한 사람>이다. '삶과 행복에 대한 통찰'이 가득한 영화라는 구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러닝타임이 2시간50분이다.

손주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청소, 설거지를 마치고, 책 좀 들여다보다가 아점을 먹고 영화를 보았다.

심봤다!

덴마크의 근대화를 위해 에너지 생산에 일찍 눈을 뜬 페르와 그의 연인 야코베의 이야기이다. 어릴 적 상처가 한 사람의 일생을 어떻게 흘러가게 하는가, 그 상처를 이해하고 만질 줄 아는 그의 연인은 어떤 삶에 자신의 생과 부를 거는가에 대한 무겁지만 가슴 뭉클한 이야기였다.

영화를 다 보고 검색을 해보니 19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리슨 폰토피단이라는 작가의 소설이 원작이었다.



좋은 영화를 만나는 일은 즐겁다. 내 생의 자락 어느 갈피에 이 행복한 기분이 좋은 에너지로 쌓여서 때로 곤고한 시절을 지날 때, 어려움을 쓰다듬을 힘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 엄마가 나를 믿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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