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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Dec 16. 2020

순수는 힘이 세다?

2020.12.16.수

몇 달 동안 공을 들였던 동인지 창간호가 나왔다. 무슨 일이건 비용이 들기 마련인데 올 여름 코로나로 모든 행사가 묶인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긴급 지원금이 왔다. 마침 우리도 자격이 되어서 총무가 서류를 올려서 동인지 발행할 기금을 마련하였다.



많이 내는 건 아니지만 세금 한 번 빼먹지 않고, 교통 딱지가 날아오면 그날로 가서 내는 솔선수범 국민이다. 나라 살림은 결국 국민이 낸 세금으로 꾸려가는 것 아닌가. 그래도 횡재를 한 것 같아 감격했다. 주위에 자랑 삼아 동인지 발간 지원금을 받았다고 얘기했더니 금방 "나라가 참 돈도 많아요~" 비아냥이 날아온다. 내가 사는 땅에는 이런 부류가 포진하고 있다. 그 말을 한 당사자도 지진피해 특별금으로 자녀 대학등록금을 면제 받았다. 이 얘기까지 거론하면 서로 낯을 붉히게 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나도 떠날 참이다.


고등학생 시절, 국어시간에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배우면서 선생님께 된통 혼난 기억이 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발표연도가 1946년이다. 해방직후, 우리 동포는 아직 만주로 북간도로 초근목피 하는 그 시절에 이런 시가 당키냐 하냐는 나의 순진한 생각에 선생님은 장황한 설명을 하시다가 종래는 화를 내셨다. 선생님의 마지막 일갈은 "나중에 운동권 되겠구나"였다.

그런데 나는 운동권도 못되고 집에서만 운동권이다.

그 시절엔 사실 난 소설에 관심이 있었고 시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시든, 소설이든 사회에 참여하고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꼈다. 문학은 문학으로서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순결하고 순수한 것이 오래가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문학이 상처받고 찢긴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다시 살아가게끔 힘을 주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그럼에도 문학은 사람의 일이라 사람을 외면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달방 있어요


그 흔한 러브도 외면하는 낡은 모텔

골목 한 귀퉁이 찢긴 현수막, 달방 있어요

한 달씩 끊어야 잇는

열두 칸

달의 방


허기진 생존이 남은 촉수 길게 뻗어

절며절며 당도한 아득한 저 변방

달빛도 등이 굽은 채

서성대는

익명의 섬


동인지에 실은 내 시조다. 저녁 무렵, 작은 소도시의 변두리를 지나다 본 풍경을 옮겼다. 참여시다.


울컥


이제 갔나 돌아서면

다시 와 두드리는


낡은 사랑 하나가 명치에 걸려있다


심장에

녹아있던 곡


각혈처럼 쏟아진다


역시 동인지에 실은 다른 톤의 시조다. 그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시국에 무슨 얼어죽을 사랑타령이냐, 하면 대략난감이다. 왜냐하면 자고로 사랑이 필요하지 않는 시국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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