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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Jan 15. 2021

머나먼 여정

2021.1.15.금

남편이 나를 떨어뜨려놓고 먼저 집으로 간다. 나이 든 남자가 집안에서 할일이 별로 없는 탓이다.
배웅을 나가는 김에 나도 손녀와 산책길에 나섰다.  어제 한 번의 경험이 있었지만 첫번째 장애물에서 걸렸다. 골목 어귀의 편의점이다. 십여 분을 집에 오는 길에 가자고 설명하고 사정을 했지만 결국 세상 서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 결국 안고 강제 이동시키며 곰 세 마리 노래를 불러주었더니 어느새 어깨를 들썩인다.



제 어미가 차려준 영양 아침밥상, 계란, 김, 브로클리,두부, 도토리묵


내가 가끔 들리는 커피집 데크에서 달리기를 하며 잠시 논다. 이어 이웃 동네 아파트 놀이터. 아무도 없어서 마스크를 벗겨준다. 미끄럼 타기, 그네 타기, 숨바꼭질.
띠동갑 친구 둘이서 잘 논다.
또 길을 나서서 이번엔 육교를 건너서 도서관으로 가는 여정이다. 지난 여름에 가고 처음이다.
제 엄마가 데리고 가 버릇해서 그런지 손녀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은 휴관일이다. 애타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길래 돌려 세웠더니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처 눈이 녹지 않은 곳에 데리고 가서 눈장난을 하며 놀았다.



아주 오래 전, 손녀보다 두어 살 많았을까?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너댓 살 무렵이었을 때였다. 엄마에게 색칠공부를 사달라고 졸랐다. 오빠는 학교에 가고 엄마는 가게를 비울 수 없었나보다. 그것을 헤아리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엄마가 돈을  쥐어주며 학교 앞 문방구에 혼자 갔다올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겁이 났지만 색칠공부가 너무 갖고 싶었다. 집을 나서서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중간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학교 앞 문방구에 무사히 도착해서 색칠공부를 샀다. 지금처럼 책으로 제본된 것이 아니고 갱지에 낱장으로 된 것이었다.
내가 산 그림은 장화를 신은 여자 아이가 작은 물동이를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옆에 작은 꽃 한송이가 피어있었다.

십여 년 전 그때 생각이 나서 가 보았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고작 이백여 미터도 되지 않았다. 한없이 넓고 아득해 보였던 운동장도 도시의 대부분 학교가 그렇듯이 조그마했다.

그 시절로부터 참으로 먼 시간을 걸어왔다. 아버지, 엄마는 오래 전에 떠나시고 그 자리에 나를 통해 이 세상으로 온 내 아이들이 있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대대로 딸이 귀한 집안의 외동딸이라고 많은 사랑을 주셨다.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랑의 힘이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랑은 천하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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