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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May 31. 2016

인어공주를 추억하며

한 장씩 넘기는 일상

오늘, 봄학기 독서모임 종강을 하며 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12주 동안 일 주일에 한 권의 책을 다루느라 숨가쁘게 달려왔다.

쉬엄쉬엄, 느리게, 달팽이 걸음으로 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아직 속도에 익숙해있는 삶의 스타일이 마음먹은 속도대로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지막 시간에라도 한숨 돌리자 싶었다.


오래 전, 국민학교(그때는 초등학교를 그렇게 불렀다.) 1학년 때, 색칠공부 종이를 사려고 집에서 학교 앞 문방구까지 걸어가곤 했었다.

까마득히 먼 길이었다.

엄마는 가끔 오빠를 딸려 보내기도 했는데 1학년이었던 나는 4학년인 오빠를 기다리지 못하고 혼자 갈 때도 있었다.

몇 해 전, 부산에 간 김에 학교를 찾아갔다.

그 시절에 살던 곳에도 가보았다.

내가 살던 집은 남아있지 않고 도로가 훤하게 뚫려있었다.

집에서 문방구까지 그렇게도 멀었던 길이 걸어서 오 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색칠공부 종이는 요즘처럼 노트로된 묶음이 아니고 낱 장으로 팔았다.

그림도 아주 단순하고 간결했다.

꽃밭에 꽃 몇 송이, 그 곁에 양동이를 든 여자아이 이런 식이었다.

마지막 수업 준비를 하면서 오십 년 전의 그 모습이 떠올랐다.

타박타박 걸어서 학교 앞 문방구에 색칠공부 종이를 사러가던 어린 계집아이.


인터넷으로 컬러링북을 주문했다.

마지막 수업은 생각을 접고, 속도를 늦추고, 욕심도 내려놓았다.

동화의 세계로 들어갔다.

왕자를 정말 사랑해서 목소리를 잃고 다리도 잃고 결국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마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읽고 훌쩍였던 어린 계집아이가 세월의 저편에 있다.

그곳에서부터 참으로 멀리, 오래 걸어왔다. 이제는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다시 돌아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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