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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Jul 13. 2020

갈비탕 끓일 군번이야, 내가?

2020.7.13.월

장마 중이라 어젯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3시인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 집은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그 소리를 즐기느라 자정을 훨씬 넘겨 1시30분 쯤 잠든 것 같다.


10시쯤,  '비 오는 날의 수제비' 생각이 간절하여 반죽을 해놓았다. 그런데 토요일 주문한 순댓국 택배가 왔다. 메뉴 급 변경.

수제비는 저녁으로 밀리고 점심으로 순댓국을 먹었다.

12시 집으로 온 남편은 옥수수 간식, 오후 간식은 감자. 며느리가 사준 에어프라이어가 있어서 요즘은 한결 편하다. 중간중간 미숫가루, 토마토 주스, 각종 견과류,  얼마전에 따온 살구, 텃밭의 방울토마토가 모두 남편의 간식이다.

도대체 얼마나 여러가지를 먹는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많이 먹지도 않고 웬만해서 순서도 바꾸지 않는다.


아침을 먹지 않는 나는 점심, 저녁으로 남편의 절반 쯤 먹는다. 중간에 커피 두 잔, 군것질 거리로는 빵이 있으면 하나 정도가 끝. 그런데도 나는 저울에 자주 올라가는 편이고 저울과 안 친한 남편은 아주 슬림하다. 불가사의다.

시어머님이 살아계셨으면 아들이 벌어서 며느리가 다 먹는 듯 느끼셔서 서운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순댓국을 달게 먹었다. 음식을 택배로 시켜먹다니 예전 같으면 도 없는 소리였다.

얼마 전, 마당 텃밭에서 거둔 채소들을 다듬고 씻고 데쳐서 저녁반찬으로 무칠 준비를 하는 시간이 자꾸 늘어졌다. 택배로 온 책들을 펼쳐보지도 못해서 은근히 부아가 났다. 주방일을 줄이자고 마음 먹었다. 그것에 앞서 부부모임에서 누군가 매일 세 끼를 집에서 차리느라 힘드시겠어요?, 하며 내게 인사치레를 건넸다. 그 소리에 남편이 반짝 얼굴을 들더니 좌중을 향해 그게 왜?, 하는 얼굴을 했다. 정말 주먹이 우는 순간이었다.

사실 아무도 내게 이렇게 살아라고 말하진 않았다. 보수적인 남편에게 내가 길들여진 것일 뿐. 남편은 내가 주방에 있을 때 제일 즐거워한다.


다행히 나는 아니다 싶으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달 들어 갈비탕 택배에 전복 택배, 오늘 순댓국까지.

내 심경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남편의 무심한 한 마디.

"요즘 택배가 자주 오네!"  

"그럼 이 염천에 이틀씩 걸려 갈비탕 끓일 군번이야, 내가?"

나의 판정승!


서랍에 넣어두었던 돌뜸을 꺼내 달구었다.

이불 위에 얹어두고 적당한 따뜻함을 즐기면서 얼마전에 출간한 지인의 여행에세이를 읽고 있다.

창 밖의 빗소리.

지친 채 서있던 마음이 스르르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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