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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Jul 16. 2020

아무튼, 도서관

2020.7.16.목

남편과 냉전 중이다. 이사를 온지 2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내 수에 말려서 자기 책을 너무 많이 처분했다고 한 번씩 태클을 건다. 그전 같았으면 일사부재리의 원칙 몰라?, 흘러간 물로는 풍차를 돌릴 수 없다는 거 몰라?, 버스 지나간 뒤에 손 들어도 소용 없는 거 몰라?, 하며 온갖 이론을 드리대며 반전을 폈을텐데 그건 다 지나간 젊은 시절의 얘기다.


지금은 그만한 정열도 없고 전열을 가다듬어 대항할 힘도 없고 귀찮기도 하다. 그저 입 닫고 일상을 산다. 그렇대도 기분이 처지는 건 어쩔수가 없다.

그래도 일 절만 했으면 또 시작이구나 하며 넘어갔을텐데 요즘은 이 절까지 간다.

"살림 줄인다면서 자기 책은 왜 그리 많이 사들여?"

남편의 저의는 자기 책을 너무 많이 없앤 것도, 내가 책을 너무 많이 사는 것에 대한 불만도 아니다. 심심하니 놀아달라는 뜻이다. 원래 밖으로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다 요즘은 이런저런 모임도 나가지 않으니 휑하니 뻗어있는 시간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나는 요즘에야 겨우 내 시간을 낼 수 있다. 그 시간을 무엇에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다. 더 나이들어 눈조차 말을 안들으면 그땐 어쩔까 싶어 조바심이 난다.


아무튼, 오전에 도서관에 갔다.

대출 중인 책을 예약해뒀더니 책이 들어왔다는 문자가 왔다.

빌리고 싶었던 책은 아무튼 하루키다.

간 김에 아무튼 시리즈를 몇 권 더 빌려왔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서재와 스웨터와 딱다구리 이다. 시리즈가 처음 나오기 시작할 때 샀었는데 그동안 계속해서 나왔나보다.

 

며칠동안 비가 왔는데 오늘은 그 비에 씻긴 햇살이 맑게 빛난다.

빨래를 해서 햇살 아래 널었다. 바람이 슬쩍슬쩍 만져보고 간다.

내 눅눅한 마음도 꺼내 걸쳐놓는다.


아이 둘을 낳아기르며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 모르던 삼십 대에 일기장에 자주 쓰던 말이 있었다. '아름답고 향기롭게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희망사항은 지금도 유효하다. 무슨 일이었는지 크게 낙담하여 우울한 날엔 '아름답고 향기롭게 한 생애를 살고 싶었거늘!' 하며 영탄조의 문장을 휘갈겨 써놓기도 했다.


3시를 넘어서 4시로 가는 중이다.

사족, 남편은 나의 수에 말려 책을 처분한게 아니란 걸 본인도 안다. 너무 오래되었고 세로 쓰기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힘든 삼성판 세계사상전집은 내가 버리자고 해도 그예 가지고 왔다.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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