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에 눈꽃이 도래하다

by 지구 사는 까만별




싸늘하고도 상쾌한 겨울 내음이 콧등에 내려앉는 늦은 오후, 동네 간판들이 곱게 붉어져 갑니다. 오른손에 뜨거운 카푸치노의 표면도 점점 붉어져집니다. 표면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길을 걷습니다.



가파른 등굣길엔 하이얀 벚꽃 대신 눈꽃이 흐드러져 내립니다. 몇 달 후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서, 잎조차 떠나보내고 태초의 상태로 섰습니다.

하늘아래 찬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처연한 직면. 저 나무에게 찬란한 봄이 있었다는 걸 저는 기억합니다. 나무와 나는 가장 매서운 시간을 유약한 기억 하나로 고요히 인내를 세어갑니다.

가장 추울 때 가장 뜨거운 꿈을 꾸는 나목. 앙상해진 나뭇가지에 품은 꽃, 그 잔상이 전해집니다.



햇살과 눈꽃이 하나하나 비늘처럼 녹아내립니다. 하이얀 벚꽃을 피워내기 위해서는 빈 손이어야 하기에. 제 손도 눈꽃을 맞아 욕심을 씻어내립니다. 빨개진 손은 전보다 깨끗해진 노을을 닮았습니다.

기분 좋게 상쾌한 겨울 기온이 차갑지만 포근하게 나를 감싸는 지금. 바람이 시간의 인과처럼 흘러갑니다. 제가 서있는 넓은 교정에도 시간이 흘러 세월에 닿고, 자연도 흘러 계절에 닿습니다. 그 속에 우리는 흘러 마침내 바다를 만날까요...

운동장에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운동을 합니다. 겨울이 고인 벤치에 서서 활기차게 물을 마시고, 나는 조금 식은 카푸치노를 조금씩 들이킵니다. 운동장에는 카푸치노의 향과 젊은이들의 땀냄새가 섞여갑니다. 말라가는 고목과 잎새만을 내는 자그마한 나무가 함께 얼어가듯이...

나도 어느 날에는 겨울에도 친구와 땀을 흘리며 걸었습니다. 노화에 의해 나의 걸음이 언젠가 느려질 것을 생각조차 못하면서 나는 봄꽃처럼 환히 웃었습니다. 잎을 떨구고 있는 지금도, 나는 나무처럼 경험했었던 봄날을 품고 살아갑니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봄은 눈꽃이 피는 날 가장 짙게 피어날 겁니다. 시간이 피워낸 얼음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바람이 생들을 재촉한 생채기에 자연스럽게 강해지듯이.



시간에 따라 부는 겨울바람이 제법 차갑습니다. 얼음은 다시 단단해져 눈꽃이 될 겁니다. 그렇기에 어둑해진 교정을 다시 내려가는 운동화의 걸음은, 쓸쓸할지언정 서럽지는 않습니다. 나는 빈 잔을 들고 운동화에 힘을 실어봅니다. 빈 잔은 겨울의 눈꽃처럼 가장 진한 커피의 향이 남아있습니다. 바람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젊음이 언젠가 깊고 고요한 호수에 닿을 수 있음을 봄날의 개화처럼 잘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