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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Feb 26. 2024

느린 우체통

지금 만나러 갑니다

 



잃을 것은 적었지만, 꿈이 많았기에 유한의 삶을 슬퍼하던 소녀. 나는 소녀의 그런 미완한 구석을 사랑했습니다.      


 입춘을 지나 밤새 한 뼘 자란 봄기운, 오늘은 봄비를 머금은 대지 위에 빨갛게 씻겨진 우체통을 마주합니다. 꽃처럼 붉어져 언제부턴가 만질 수조차 없는 꽃이 되어버린 우체통은 미완의 산업으로서 추억에 박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서투른 추억 속에 반나절 뒤조차 가늠하지 못하던 소녀가 한 걸음씩 빨간 상자 속에 들어옵니다.


 묵향이 얽히고설킨 나무필통이 든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촉촉한 흙길을 걷습니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필통에 나란히 누워있던 키 다른 연필들이 상쾌한 마찰음을 냅니다. 비와 개구리와 키 다른 연필들이 소녀가 부르던 노래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소녀의 필통에서 연필 한 자루를 빌렸습니다.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자신에 대해 노래를 하지 않았던 그 소녀를 악보로 남길 시간입니다.     



제1악장

 푸르른 고향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동네, 푸르른 마음씨를 지닌 부모님의 집에서 너는 외출을 나왔구나. 오늘은 비를 유난히 좋아하던 소녀가 가장 좋아하는 회색의 하늘이기 때문이지. 소녀는 우산을 쓰고 흘러내리는 습윤한 색채들을 회색 하늘에 캔버스 삼아 칠합니다. 비가 부연 먼지 묻은 초원을 씻은 후 하늘이 개면, 푸르른 집으로 돌아가 주워온 나뭇잎을 말리는구나. 그런 소녀가 지나간 초원은 오래도록 푸르게 반짝였지.

     

제2악장

 유한된 삶을 생각할 때마다 목 따갑도록 슬퍼하던 어린 너를 여리게 떠올린단다. 소중한 만남 뒤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아픔의 이별이 따른다는 것을 너는 무서워했어. 그러나 봄날에 꽃이 피면 늦가을 단풍은 맥없이 낙엽이 되어 낙하하는 것이 푸른 병풍의 섭리. 네가 두려워하던 이별을 나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 네게는 슬픈 소식이겠구나. 그러나 낙엽이 떨어져야 다음의 봄이 올 수 있음을 차츰 깨달아가고 있어. 한때 날카롭던 흑연을 갈아가며 소리를 만들어내던 필통 같은 거였어. 비를 좋아하는 너는, 흐림이 있어야 맑음이 소중할 수 있음을 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제3악장

 음악과 편지로 삶을 위로하고 축복하기를 좋아하던 너. 많은 이름들을 우체통에 밀어 넣으며 그 안에 많은 감정들로 웃고 울고 있구나. 그런 너이기에 바람이 이는 풀잎소리에도, 부슬부슬 세상을 적시는 빗물 소리에도, 투명하게 빛나는 누군가의 공감 어린 눈물에도 감정이 동하는 여린 너. 그런 약한 너는 미래에 어디에서 누구의 위로와 축복의 등을 토닥이며 살아가는 걸까 고민하며 잠에 드는구나. 그래도 사색과 낭만 속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참으로 불확실한 꿈을 막연히 믿으면서.    


 나는 여전히 음악과 편지를 좋아한단다. 약한 나라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글을 놓았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음악을 틀어놓고 글자를 써내려 나가고 있어. 집배원의 손에 스쳐간 많은 이름들이 밀물 위 모래처럼 사라지지만, 그 파고에도 꿋꿋이 동행하는 나의 등대들도 찾았어. 네가 바란대로 대부분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지 않기에 오히려 또렷하게 새겨지는 진한 이름들을 향해 나는 매주 한 자씩 써나가고 있단다. 아직도 전화보단 문자가 더 편안한 나지만, 비 속에서 맑음보다 빛나는 걸 찾던 소녀 위에서 나는 오늘도 자판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어.

 많은 이름들이 소녀의 편지를 환영해 주었지만, 필통 소리를 소란스럽게 울리며 달리던 소녀의 노래는 나 홀로 들을 수 있는 거야. 철없이 행복했던 과거의 나도, 철들어도 여전히 부족한 지금의 나도 모두 연약하기 그지없기에 우린 언제나 함께 할 거라 믿어. 언제나 네 안의 작은 음악소리를 잊지 않으며 어른이 되어가길 바라...


이제 친절한 소녀에게 연필을 돌려줄 때입니다. 소녀의 가방 속 필통에 몰래 연필을 넣어두렵니다. 자라나는 소녀에게 그녀의 동경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인생의 오답노트들보단, 정답을 모르고 풀어나가는 미완의 퍼즐을 소녀의 가방에 넣고 잠급니다.

 집배원 아저씨가 소녀의 가방에 담긴 동경들을 싣고 작은 동네 밖으로 조금씩 나아갑니다.    

 



p.s   나약하던 까만 긴 생머리의 소녀(과거)에게

지구 사는 까만별느리게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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