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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Oct 19. 2024

한글에게

내가 살던 고향은 언어가 피었네




 하늘강 아래 표류하는 거대한 물풍선에 소란하게 쏘아대던 매미가 여름과 함께 실종한 작금. 매미의 데모가 끝나고 홀로 된 나무가 추억처럼 들러붙은 습윤함을 추풍에 못내 잊으려 합니다. 강렬한 여름의 폭정과, 뜨겁게 타오르는 반작용들을 더위가 물러나간 갈색의 이파리로 어찌 추억해야 할까요. 초록 이파리들은 바삭거리는 햇살 아래 서서히 물들일 방식을 택했고, 는 사라져 버린 감정의 방향을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려 합니다. 하늘로 종이배를 띄우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식은 나의 언어로 가을처럼 생각에 잠기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영역과 같은 문자인 당신을 공유하고 있으니, 내가 유일하게 학습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 글자들로 신발을 휘감는 선득한 점도의 염원을 그려봅니다. 숲향이 묻은 추풍과 저 하늘처럼 끝 간데없이 펼쳐진 하얀 마음. 저는 마르고 높은 하늘에 연필로 닻을 내려 당신을 만난 미시적인 역사를 반추하려 합니다.     


 배냇저고리 대신 모시이불을 둘둘 감싼 채 선잠에서 들려온 늦여름의 노동요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서 나에게 가나다를 알려준 겨울의 엄마와,

모시이불에서 나와서 첫 번째 교문에 들어선 삼월, 숙제를 못 끝내고 저녁는 막내에게 친절하게 종이를 같이 채워주던 아버지와,

센치한 가을의 청소년에게, 골방에서 세계일주에 동참시킨 낡은 책들과,

자취방에서 차게 식은 월급명세서와,

다시금 작고 무용한 것들을 되찾기 위한 지금의 초고들까지.     


 어릴 때부터 창너머로 배워온 땀에 절인 어른들의 노동요에서 삶의 애환이 느껴질 즈음이면 사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피부에 설움과 웃음을 태우며 생애를 도돌이표 하면, 나지막한 담장을 넘나든 작은 언어들이 안부가 되고 정이 되었습니다. 담장을 넘는 것 같은 띄어쓰기와 마침표는 인연들 여백이 되어 지금껏 제가 습득해 온 나의 한글이었습니다.     


 바람과 햇살처럼 나를 성년까지 지켜준 한글로 저는 서점 옆에서 작은 문구점을 써갑니다. 한글로만 이루어진 작은 문구점은, 한글로 세워진 기라성의 서점 옆에서 한글로 된 꿈을 꿉니다. 매미가 사라진 가을에 느끼는 감정을 한글로 온전히 담을 수 있을 때까지 의 커서는 그대를 깜빡이며 공부합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의 그대는 현상이자 감정이자 결국 나입니다. 수분만큼 가득히 나를 이루어준 당신께 오늘에서야 작은 안부를 남깁니다.   

  


2024년 가을,

지구 사는 까만별 씀     



추신.  그대의 활자 위 함의되고도 만나지 못한 언어 속에서도, 사라지지도 않을 약한 음성들겨울을 지나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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