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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Apr 08. 2024

침입자

1. 초심자의 불운(beginner's unluck)



 포로처럼 반나절 이상을 비행기 속에 구겨지다 겨우 벨트를 풀고 탈출한 프랑스 은 아직 쌀쌀했다. 풀려나온 곳은 굉음이 낮게 비행하는 여전히 광활한 공항의 뱃속이었다. 뱉어내는 짐을 가까스로 찾은 뒤, 구석진 의자에 앉고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여태 계획했던 것들을 무사히 복원시키고픈 여정의 탱탱한 출발선에서 나는 다가올 오싹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 진정한 후 비행기에서 멀미하던 휴대폰을 깨운 뒤 공항에서 구입한 유심을 끼웠다. 전원을 새로 켜니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나에게 던져졌다.

 ‘어라, 나는 패턴을 등록한 기억밖에 없는데?’ 뜻밖의 문구에 결국 나는 세 번의 시도를 날렸다. “더 이상 이 기기를 사용할 수 없고 가입한 대리점으로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렇게 타지에 던져져 버렸다.

 지금 당장 찾아가야 할 숙소 어플조차 켤 수 없게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딸아이가 엊그제 별생각 없이 캡처해 둔 숙소 위치를 바탕으로 딸아이의 휴대폰을 켜서 가보기로 했다. 공항을 빠져나가는 길에 정찰제 치고는 지나치게 비싼 택시를 홍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무진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려 거기서 지하철 타면 숙소까지 바로 찾아갈 수 있다는 호기로운 계획에 동조하여 드디어 공항 밖으로 캐리어를 구르기 시작했다.    

  

 리무진 버스에서 내다보는 노을이 채색하는 파리 저녁 풍경은 고즈넉했다. 하지만 마음의 꽃을 품어야 눈앞의 꽃도 보이듯, 갑자기 먹통이 돼버린 휴대폰이 노을처럼 내 마음에 물들어가고 있어 풍광도 안갯속에 드리워졌다. 개통한 대리점이 문을 여는 내일 낮까지 사용을 못하게 된 내 폰 대신, 딸의 폰으로 연락할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버스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초봄의 밤은 어둑해지고 거리를 휩쓸던 한기가 내 몸을 훅 덮쳤다. 무거운 캐리어를 밀고서 저어기 보이는 지하철 입구로 다가가 지하로 내려갔다. 내려가면 바로 있어야 할 매표소가 근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추운 날씨만큼 분주한 시민의 발걸음을 멈추어 매표소 위치를 물어봐도 여기는 없다는 대답 외엔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지상으로 다시 올라와 택시를 붙잡았다. 차가운 밤거리를 헤매다 택시에 타자 공항에서 진작 안 탄 게 후회될 정도였다. 낯설어 더 차가워진 공기를 뚫고 한참을 달리고서야 내밀었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현관 불이 켜지며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현지인이 반갑게 인사해 주었고, 우린 주소가 찍힌 폰 사진을 보여주며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바로 뒤에 위치한 우리가 예약한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녀는 불어를 주로 쓰기에 거의 알아먹을 순 없지만 분위기상 주인인 듯하여 우린 영어로 자초지종을 건넸다. ‘폰이 먹통이 되어 어플을 지금은 열 수가 없다. 여권 여기 있으니 예약자 확인 좀 해달라’.

 그러자 그 여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직접 그 어플에 들어가서 비밀번호를 확인해야 된다. 영 곤란하면 오늘은 다른 곳에 가서 자고 내일 다시 오라’는 메시지인 듯했다.     


 여러 숙소를 옮겨 다니기 힘들어 한 곳에 오래 머물기 위해 좋은 리뷰로 찾고 골라서 겨우 예약한 곳인데 다른 곳에 가서 자고 내일 다시 오라니... 주인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당장 이 시간에 어디로 갈지도 막막하지만, 다른 곳을 찾아 숙박하게 되면 그 비용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사람은 그 돈을 지불할 수 없다는 듯한 모호한 와 단호한 표정을 남기곤 본인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길바닥에 던져진 우리. 당장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버린 상황과 초봄의 추위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 둘만 남아버린 지구에서 가장 멀고도 찬 길목에서, 문득 문제의 유심을 빼고 원래 유심을 넣는다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밑져봐야 본전이라 생각하며 원래 유심을 넣었더니 원상태로 자동 복구되었다. 연신 떨리는 손으로 숙소 어플부터 확인하니 우리가 비행하던 시간에 보낸 집주인의 문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해 준 비밀번호를 누르니 앤틱한 디자인의 길쭉한 현관문 열쇠가 들어있었다.      


 딸깍! 드디어 숙소로 들어왔다. 골목을 기어 다니던 추위와 공포는 현관문을 닫는 순간 사라졌다. 작은 전등 하나가 연연하게 반겨주는 아담한 이층 집은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정겹고 따스했다. 1층엔 두 평 정도 되는 작은 거실과 부엌이 붙어있었고, 현관 바로 앞에 2층으로 올라가는 낡은 나무계단이 있었다. 올라가 보니 왼쪽에 화장실이 있고 오른쪽엔 우리가 며칠 묵을 큰방이 있었다. 화장실과 우리 방 사이에 창고 같은 느낌의 작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잠겨있었다. 그렇게 집을 한번 둘러보고 거실로 내려와 캐리어를 열었다.     


 장시간 비행과 공항에서 이곳 숙소에 들어오기까지 극심한 피로와 추위까지 더해져 떨리던 육체는 실내에 들어오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작은 물건 하나 들어 올리기도 힘겹고 노곤했다. 캐리어를 열어 당장 씻고 갈아입을 잠옷과 칫솔만 꺼내곤 자고 일어나서 캐리어를 2층 방에 올리자며 우린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 씻고 기절하듯 침대에서 바로 잠들었다.     


 지친 꿈 속에서도 악몽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에서 나는 소리인지 처음엔 아득하게 들렸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데시벨은 점점 커져갔다. 부술 듯 문이 소란하게 흔들리고 이리저리 쇠붙이가 마찰하는 소리... 밤늦도록 우리가 현관문을 열고자 한 마음의 소리들이 신기하게 꿈에서도 다 들리다니 참 이상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을 여는 소리가 꿈이 아닌 1층 거실에서 퍼져 울렸다. 당연히 악몽인 줄 알았던 일이 현실이었다니. 이 집에 우리가 아닌 누군가 침입해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딸도 점점 커져가는 소리에 잠을 깨서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2층 계단으로 올라오는 묵직한 발걸음이 조금씩 가깝게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삐걱...삐걱...삐걱...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계단의 울음소리가 방을 향해 먼저 뛰어왔다. 아이와 난 서로 부둥켜안고서 제발 이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걸어 올라오던 발걸음은 모녀의 간절함에도 아랑곳 않고 이어지더니 2층 우리 방문 앞에서야 멈췄다.          







# 유달리 삐걱거리던 여행 숙소의 나무계단을 보고 영감 받아 작성한 창작물입니다. 총 3화 정도의 분량으로 써볼 예정이며, 2화는 다음 주 월요일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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