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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May 06. 2024

사실대로는 보이지 않더라도

오랑주리 미술관, 클로드 모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어려운 일을 평생 해왔다는 할아버지의 자부심은, 어느 날 할아버지의 절망이 되었습니다.


 굴곡진 세월만큼 주름진 하관에 흰 수염이 구름처럼 고즈넉한 그의 인상. 절망이 오기 전 그의 작품은 턱에 핀 흰 구름처럼 맑았습니다. 구름을 쫓아 도착한 작은 시골 마을. 그곳에서 태양에 부수어져 내리는 다양한 초록들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코로 쉼 없이 호흡하듯, 그의 눈은 그가 가꾼 정원의 물빛과 수련을 끝없이 바라봅니다. 두텁게 겹쳐 바르는 방식은 수면의 질감과 일렁거림을 표현하고, 수면 아래 굴절되는 빛과 깊이를 햇살처럼 투명하게 투영합니다. 연못 위 부유하는 수련과 다양한 식물들, 그리고 긴 머리를 감듯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 수평선 없이 아른거리는 물결의 환영에 그는 부족함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물비린내를 품고 고고하게 초록빛을 뿜는 수련에서 매일의 변화를 느낍니다. 고정된 풍경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빛의 조각은 화가의 눈을 잠시 거쳐 캔버스 위에서 영구히 반짝였습니다.      


 태양이 닳도록 수련의 초록을 베일에서 벗겨주었고,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그린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그의 눈은 태양에 의해 점점 닳아갑니다. 신에게 받은 눈으로 신에게 받은 풍경을 그리고, 신에게 눈을 되돌려 줘야 했던 그. 여러 번의 눈 수술 끝에 신은 그에게 수련의 푸른 그림자 색을 가져갔습니다. 더 이상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할아버지의 욕심일까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오늘도 그림을 그립니다. 푸름이 있는 걸 알지만 푸름이 보이지 않아도,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옮깁니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왔으니까요.     


 언젠간 자신에게 파란색뿐 아니라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할 그날을 위해  가지 주문을 했습니다.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게 하시오. 그리고 작품은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볼 수 있게 전시해 주시오.’

 할아버지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닮은 작은 미술관이 완공되기  달 전에, 클로드 모네는 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하얗고 조용하지만, 언제나 햇빛과 사람이 끊이지 않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발을 디딥니다. 길쭉한 타원형의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수련을 팔자로 전시해 두었습니다. 무한대의 수련 8폭 속에서 그의 영원한 정원과 햇빛이 흘러가는 과정을 말없이 조망합니다. 타원형의 기다란 벽을 타고 흐르는 연못은 둥글게 휘어져 내 걸음에 맞추어 조금씩 이동하고, 둥글게 팔을 벌린 듯 나를 안아줍니다. 물비린내가 나는 수련은 화폭에서나마 잃었던 푸른색을 소롯이 품고서 관람객의 눈에서 각기 다른 색깔로 다시 피어납니다. 그의 시력을 되돌려 받은 태양은 오늘도 고고히 화가를 생각하며 시간마다 다른 빛으로 그의 작품을 반영합니다.


있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전과 다른 수련 색을 보고서도 담담히 수련을 가꾸던 마음. 하얀 캔버스 같은 오랑주리 미술관에 초록빛이 파동처럼 밀려옵니다.

바라보던 하늘이 눈을 감고 수면만 남은 팔자의 여덟 폭. 고요한 초극(超克)이 고인 호수를 바라보는 사람들 눈 속에 푸른빛의 수련이 살아납니다.           

         







모네는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그렸습니다. 왼쪽이 백내장 수술 전, 오른쪽이 수술 후에 그린 자신의 정원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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