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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May 26. 2024

미술관을 스친 낡은 신발이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내 삶 주변에 고흐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나도 그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소박한 소재의 그림들만은 외면하곤 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신발장엔 고흐의 신발과 닮아, 닳은 아버지의 신발이 있었다. 한 켤레의 신발이 고흐의 그림처럼 낡기 위해, 아버지는 매일 흙을 뒤집으며 씨앗을 뿌리고 수확물을 거두며 흙을 묻혀왔다. 물감처럼 옷에 흙이 한가득 묻어오는 아버지의 시커먼 신발이 터벅터벅 걸어올 때 즈음이면 날이 저물어 신발처럼 시커멓다.



 자식들이 다 자라 둥지를 떠나고서야 아버지의 신발은 굳이 낡을 필요가 없어졌고, 닳아가는 만큼 엄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아버지 얼굴에 뒤늦은 미소와 여유가 깃들기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평생 흙을 묻혀온 신발처럼 당당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이 물씬 풍겨졌다. 고흐는 그러한 농민의 근면성을 찬양했지만, 아버지의 근면이 과연 자의적이었을까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배경처럼 검어졌다.     


 아버지와 거의 비슷하게 밭일을 끝내고 귀가한 엄마는 곧장 부엌으로 출근했다. 한참 군불을 때다 보면 시커먼 가마솥에서 하이얀 김이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아버지가 마당에서 이것저것 치우다 보면, 아침 일찍 등교해서 동네 어귀에서 놀던 아이들이 굴뚝 연기를 보고 하나둘씩 돌아온다. 새벽에 들로 나선 엄마는 해가 다 져서야 마침내 온 가족과 둥그런 밥상에 함께 둘러앉는다.  

   



뜨끈뜨끈한 구황작물, 시원하게 익은 물김치에 소박한 나물무침에 밥 한 그릇.

조촐하기 짝이 없는 밥상이지만, 물김치 한 장을 뜯어 쌈장 조금 넣고 쌈을 싸 먹던 맛은 이제는 어떤 고급스러운 음식보다 먹고 싶은 고향의 맛이다.

희미한 조명 아래 퀭하게 고단해 보이는 눈빛만이 식탁 위를 오가는 ‘감자 먹는 사람들’.

 다른 찬이지만 우리 가족과 그림 속 가족은 비슷하게 그릇을 비워갔을 것이다. 그 고단함에는 지나치게 거리감이 없었기에 나는 사람들처럼 감자 먹는 가족을 좋아할 수 없었고, 감자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전 젊던 아버지가 터벅거리며 신던 시커먼 신발을 뒤로 두고 다른 남매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고향을 떠났고, 아버지와 의도적으로 다른 신발을 신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의 낡은 신발이 없었다면 나는 반짝이는 구두를 신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생전 빛을 못보다 후손에게 자신의 작품을 아낌없이 비춘 고흐처럼, 신발에 흙을 묻히며 감자를 먹인 아버지의 자식들은 모두 각자의 보금자리를 이룰 수 있었다.   

  

 고흐 미술관의 제일 마지막에는 그의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는 거대하게 만개한 나무 그림이 있다. 한여름 마당 툇마루에 누워 찐 옥수수를 먹으며 개구리와 함께 별을 세던 밤들을 지나 한 쌍씩 가정을 이루는 거대한 가계도가 아버지의 낡은 신발을 양분 삼아 지금껏 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신발만 남기고 흙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아셨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되지 않아 손주의 가지에서 새로운 생명이 또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고흐가 동생인 테오의 아기가 태어난 소식을 듣고서 조카에게 선물해 준 아몬드나무에서는 여전히 생명력의 향이 싱그럽다.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던 고흐의 소탈한 그림에서조차 오늘의 나는 축복을 흠뻑 맡는다. 화가와 아버지의 상상 속에서 나무는 액자 밖으로 뻗어간다. 별과 별이 빛나는 밤의 사랑이 오래도록 이어지듯이.








https://youtu.be/ciLNMesqPh0?si=BtE50yQFB1896t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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