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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Aug 05. 2024

깨진 거울에서야 진실이 비친다

피카소 미술관에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면, 인간의 그늘까지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요? 보이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에 집착하던 한 예술가의 사념을 찾아 나선 길이었습니다. 초봄 투명한 햇살이 대지에 무수한 기둥을 세우고, 불투명한 걸음의 출근 자국들이 기둥을 터벅터벅 부수며 지나갑니다. 미술관을 향해가는 나의 설렘과 같은 아침 버스를 탄 시민의 한숨 중 얇은 트렌치코트 옷깃에 내려앉은 한기만이 진실인 것 같습니다.     


 무색의 꽃잎을 태운 쌀쌀한 바람을 가르고 건물을 가로질러 걷다 보니 조용한 외각에 미술관이 펼쳐집니다. 호텔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다는 흔적이,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외벽과, 실내조명처럼 은은한 베이지 톤의 내벽과, 까만 철근으로 장식된 중앙계단과, 벽을 장식한 부조들에서 보입니다.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에 어떤 작품들이 투숙하고 있을까요. 하얀 벽과 갈색 서까래의 숲을 향해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작품과 작품 사이 여백 위로 평면의 캔버스에 모든 차원을 그리고 싶었던 화가의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표정과 풍경은 시차의 발걸음을 따라오건만, 부족함 없이 그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화가는 그때 아프리카의 가면을 떠올립니다. 사람의 얼굴이 단순한 도형으로 채워지는 비어있고도 온전한 조형물.

 충만이 주는 비움이 ‘공()’을 가리킵니다. 비어있기에 언제든 새로이 채워지는 물성들을 통해 모든 차원을 담아내고자 했던 화가의 무형의 사념을 구현시켰습니다. 그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화가로서 위상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그림 말고도 일상의 도구로 만든 작품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화가는 자신만의 다양한 색감과 구도를 끊임없이 시도하며 구축했습니다. 어릴 땐 어른처럼 그림을 그리고, 어른이 되고서는 평생을 아이처럼 그리기를 노력했다는 피카소.

 캔버스 안팎에서 끝없이 사물과 인물을 쪼개고 조립했던 는 큐비즘이라는 고유의 용어를 남깁니다. ‘큐비즘은 파괴되어 사라질 수 있어도, 피카소의 작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문장이 까맣게 새겨진 하얀 벽의 고요처럼 그의 얼은 여전히 살아 후대인들이 방문합니다.     


 네모난 입방체 하나로, 한쪽 면만 보는 편견의 세상에 전모를 내놓았던 그의 눈은 지혜롭습니다. 세계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예술의 경지를 홀로 꾸준히 확장시켰으나, 그의 삶은 그의 작품처럼 캔버스에 그림자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성숙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여인들과 부적절한 만남을 가졌고 그로 인해 여러 영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늘지는 옆면까지도 한 캔버스에 드러나는 그의 작품처럼, 영감이 되어준 여인들에게 그는 명확한 그늘이 되어 마음에도 파편만이 뒹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은 빛을 받았지만, 영감의 원천들은 깨져가며 화랑에는 명과 암이 작품처럼 동시에 드리워졌습니다.     


 생각하는 것을 그리고 만들던 그는 평면인 캔버스 위에 입체를 표현키 위해 물체를 여러 관점으로 분리하고 다시 조립하는 천재성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신체의 모든 측면을 한 화면에 그리는 그의 작품처럼, 그의 인생에는 입체적으로 시청할 요소가 많습니다. 조금은 기괴한 눈빛이 시선을 빨아 당기는 강렬한 인상의 여인들이 찬란히 스러지기 전에, 오늘도 고유의 작풍을 입은 모습으로 세상 너머를 구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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