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에 살포시 내려앉는 춘삼월의 스산함. 내가 오래전부터 사랑한 온도가 트렌치 위에 잠시 머무릅니다. 톡톡한 소재의 옷깃을 세우고서 짤막한 계절을 마중 나서는 발자국에는 햇살이 바삭거립니다. 봄기운이 절기처럼 완연한 어느 날, 마침내 당신을 만나고자 긴 설렘을 더디게 내딛습니다.
생전 당신이 집요하게 그리워하던 것의 파편이라도 줍기 위해 난 당신을 만나야 했습니다. 내 영혼에 영원을 새겨준 그 빛줄기를 다시금 맞는 꿈을 꿉니다.
당신을 맞이하기 위한 과정은 드러나는 것보다 힘든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구 건너편 어딘가 머물렀던 당신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로 반나절이 넘도록 몸을 구겨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쁘게만 보였던 그대들의 풍차에는 돌아가지 않으면 잠길 수 있다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농작물도 많이 없는 그곳에서, 당신들은 다른 대륙을 향해 끊임없이 인도를 향한 승선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과 그것이 극복된 나무집들이 트램 창가에 조금씩 녹아 후손인 제가 여유로이 관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운하는 어디서나 그림처럼 흐르고, 사람과자전거가 물처럼 흘러 지나가고, 알록달록 블록 같은 목조건물은 사람과 자전거의 정착지가 되어 조금씩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강인할 수밖에 없었던 유약한 영혼들이 흐르는 운하의 끝에서 하루라도 빨리 당신에게 닿고 싶었습니다. 갈 곳을 자세히 몰랐기에 무작정 박물관에 갔습니다. 예술의 혼이 고고하고도 묵직하게 숨을 쉬는 거대한 외관. 박물관에 짓눌리지 않도록 속으로 긴 호흡을 켜고 들어섰지요.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 들어온 기분이 이런 건 아닌지요. 선조들의 고뇌와 고통으로 탄생했을 물성의 자국들이 어둠 속에 빛처럼 그득 차오릅니다. 쉬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나를 붙잡는 결과물들 사이를 꾸물꾸물 나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우연하게도 내 눈에 빛이 들어옵니다.
빛은 많은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경비원이 있었고, 단단한 유리와 펜스가 사람들의 접근 속에서 빛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빛을 보호하기까지 빛은 어둠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침공의 위협에서 어느 시골 속으로, 요새화된 성 안으로, 배로 운반되어 대장간의 창고 속으로, 지하실 철제 원통 속으로, 지하동굴 방공호로 옮겨 숨으면서 오래 고요히 서러웠던 당신의 긴 찰나를 봅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이곳에 안착했지만 두 번의 우발적 습격으로 생채기가 나고서야 편히 숨을 고를 수 있었던 야간의 경비들. 그들은 오늘도 말없이 조명을 받으며 출전 준비를 합니다.
경비대들이 알려준 방향대로 나는 당신의 생가로 걸어가 봅니다. 윤슬이 어린 운하가 흐르는 곳에 위치한 저택은 당신의 숨결을 잘 살려 두었습니다. 4층의 저택이란 이름과 달리, 놀라울 만큼 사치재가 없습니다. 4층의 저택이라기보단 4층의 아뜰리에라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림을 위한 수집품들, 후학을 위한 제자들의 방, 자신의 작업실, 판화를 만드는 판화실... 그림에 집중된 동선은 철저히 당신을 가리켰습니다.
의외로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당신의 작품도, 공간도 아닌, 당신의 물품이었습니다. 새삼스레 당신이 그림을 그린 재료가 튜브 속 물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거였습니다. 물감 대신 천연의 염료를 직접 갈고 섞어 만들던, 하지만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는 시기의 당신이 여기저기 스칩니다. 오래 머물러 작업했을 화구와 판화 작업, 그리고 문하생을 기르며 가르치던 알록달록 이젤들도 오늘의 춘곤증을 이겨내며 객들을 구경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거칠고 부드러운 붓질로 회화를 실천했던 화가는 머릿수건을 두른 채 자화상 앞에 내려앉습니다. 많은 야외 속 이웃들의 삶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어둠 속에서 지내던 그. 이제 당신의 집에는 당신의 암실을 보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습니다.
뚝심 있게 쏘아 올린 당신의 세상사와 인간사 속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자유를 만끽합니다. 당신의 창가를 뚫고 쏟아지는 햇살은 댁을 빛내는 어둠과 혼합하며 광화(光畵)를 만들어냅니다. 당신에게서 한나절동안 명암을 배웠던 저. 해가 지고 댁을 나오는 나의 발걸음에는 역설적이게도 조금씩 그림자가 사라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