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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Jul 22. 2024

새 살이 날 때까지




 밤이 어두움을 인지해야 등불을 발명할 수 있듯, 세상의 많은 승화는 결핍에서 태어나곤 한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장대한 서론과 걸맞지 않아 보이는 우리 집 한쪽 벽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집이 그렇듯이 처음 이사했을 때부터 최근까지 벽에는 비교적 많은 가전제품이 오고 갔다. 그런데 유독 침실의 한쪽 벽에 비치된 가전제품들이 연달아 은퇴식을 겪게 되면서 그 벽은 점점 상흔으로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거실에 좋은 가전제품을 두고 남은 것들을 안방에 숨겨둔 결과, 나의 침실 벽면은 여기저기 찢어졌다.

  내가 가장 오래 머무는 방에 귀중하지 않은 것을 둔 걸까. 이제라도 드러나는 벽이 아닌 생채기가 난 나의 벽을 돌보아주고 싶었다.


 벽을 빛나게 하는 방법에는 멋진 색으로 벽을 칠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예쁜 벽지를 붙여 너덜 해진 자리의 흔적을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전제품들을 버텨낸 벽 사이로 네모난 창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창고에서 졸고 있었을 그림을 꺼내 뽀독뽀독 깨워주었다. 먼지처럼 횟빛이 돌던 인물들에게 서서히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뺨에 생기가 넘치는 인물들은 우리 집 두터운 벽에 난 네모 창문의 정다운 이웃이 된다. 생채기 난 빈 벽은 그렇게 창 사이의 여백으로 그 의미가 변해갔다.      


 상처 난 벽이 창들의 장으로 거듭난 날, 나는 액자 속 인물들의 단면들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성냥을 켜는 성냥팔이 소녀가 그렇듯, 한 점의 그림이 집안에 들어오기까지는 사람의 진실된 마음이 있었다. 채광과 온도까지 표현된 가지각색의 풍광 아래, 다양한 군상들의 살아가는 마음들이 따스하게 공간을 밝힌다.

 햇살이 비치는 벽에서 발레리나가 춤을 추고, 연주가가 음악을 켜고, 나무 사이 줄줄 녹아내리는 몽소 공원의 햇살 아래 여유를 부리는 소담한 호흡도 들린다. 고흐가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슬픔도 비치고, 자신이 키운 고양이에게 향한 화가의 마음도 동시에 노랗게 강조된다. 그리고 내가 잠든 새벽에도 이어질 음악과 춤사위와 정다운 이야기들을 나는 모른 척 오래도록 바라보려 한다.     


 멈추어 새겨둔 회화의 시간이 공간 속으로 내리쬐는 시간, 날마다 관람객인 나는 마음의 등불을 켜고 액자 위를 거닌다. 다른 시공에서 살다 온 우리는 지금 여기에 교차하여 마주한다. 다른 생각으로 그려진 회고의 공간에 스미는 은은한 빛 아래, 투박한 그릇 같은 나는 다른 생각 아래 앉아 오래 긴 공감을 배워가고 싶다.


 그리고 생각한다. 만약 내 벽에 상처가 없었다면, 작은 회랑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방의 걸린 그림들의 창조 또한 화가가 지닌 그림자 없이는 불가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창작 또한, 글을 쓰지 않았던 시절과 상실 없이는 작동되지 못했을 것이다.

뜨겁고도 찬 시간을 녹여 한 점의 초상화와 풍경화로 남을 나의 초고를 오늘도 완성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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