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교정의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포장마차 정문을 두드리고는 바닥에 누워 맥없는 숨을 쉬었다. 대완은 유한한 세월을 가리키는 이파리들의 경고를 바라보다 자신에게 도래할 봄을 다시금 삼켰다. 하지만 대완이 사는 세상에서는 봄이 어느 세월에 올지 알 턱이 없었다. 대완은 홀로 긴 겨울을 사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겨울을 향해 행인들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낙엽 속에 숨은 햇살이 터지며 바스락거렸다. 잠시후 익숙한 음성들이 후두둑 장막이 걷히며 찾아들었다.
“선배니임. 저희 왔심다.”
흔들리는 포장마차 벽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빼꼼히 들여다보며 들어왔다. 기장이 자릴 비울 때면 대완 홀로 생각이 깊어지는 연유로 찾아드는 적막감은, 흥성거리는 웃음소리에 스르르 자취를 감추었다. 매일 포장마차를 찾는 저 후배들은 포장마차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친구이자, 대학생이던 자신의 걸음과 꽤 닮은 마음이 가는 풋풋한 동지였다. 그들은 대완이 포장마차를 하며 얻은 두둑한 보너스와도 같았다.
“어 그래. 어서들 와라.” 대완은 환히 웃으며 수업 마치고 귀갓길에 들른 후배들을 반가이 맞았다. 후배들은 자연스레 대완의 동업인을 찾았다.
“캡틴 선배님은 오늘 안보이시네요?”
“캡틴 요즘 좀 바쁘시다. 재료 사러 나가서도 이상하리만치 늦게 들어오고 그러더라. 모르는 척 해줘래이.”
“에이 알죠. 접때 두 분과 길에서 마주쳤어요. 캡틴 선배 얼굴이 새빨개지시더라고요. 이것도 비밀입니다 선배.”
결원을 가볍게 골리며 시작한 인사를 뒤로 물리고 대완은 황급히 조리대로 달려갔다. 후배들이 배고플세라 뜨끈하게 데워진 떡볶이를 커다란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푸지게 마음을 들고 돌아온 대완을 보며 후배들이 환호를 지르며 포크를 집었다.
“우와 오늘도 진짜 맛있어요. 선배님,”
겨우 떡볶이 한 접시에 부유한 마음을 전하는 후배들을 보며 대완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엊그제 단속 나온 날, 너희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줘서 살았다. 이건 꽁으로 먹어라.”
후배들은 호쾌하게 웃었다.
“아, 진 선배님은 당연히 저희가 지켜야지요. ‘그날이 오면’ 사장님께서는 언젠가 신문사 기자, 아니면 신문사 사장님이 되실 건데요. 다 그날을 위한 투자입니다. 투자.”
조리대 위쪽 켜켜이 놓인 대완의 사회 인문학 서적을 훑으며 후배들은 신나게 말을 이어갔다.
“그날 학생회실에서 선배님 전화받고 저희가 냅다 뛰었다 아입니까. 단속차 돌려보내며 단속원에게 협박도 했심다. 아 이거 구청 민원 전화기에 불나서 업무 마비되고 싶냐 카면서요. 흐흐.”
아군이라 안심할 수 있는 섬뜩한 공격에 대완은 미소를 지었다.
“허허 내가 너희들 덕분에 지금껏 편하게 일한다. 우리 후배들 아니면 내가 오늘까지 장사 못했지 싶으다. 항상 고맙데이.”
대완이 감사를 전하는 동안 청춘사업으로 지각한 기장이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후배들이 모두 캡틴을 환영했다.
“캡틴 선배, 왤케 늦게 왔어요? 얼굴도 못 보고 갈 뻔했잖아요.”
“그럴 리가 있나. 너네는 한 번 오마 밤새 여 있는데.”
후배들은 딱히 부정하지 않으며 냅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왤케 늦게 왔어요? 혹시 캡틴 선배 우리 몰래 누구 만나요? 우 배신자.”
캡틴은 옅게 웃으며 변명을 시작했다.
“내가 여 오는 중에 크게 깨달은 게 있다. 자, 함 들어보래. 내가 여태 도로에 STOP 표지판만 보면 늘 궁금했거든. 저게 스튜던트 타임 오브 페이션트일지, 스튜핏 탑 오버 뭐시기일지 답도 안 보이는 기라. 그런데 오늘 오후 4시에 햇빛에 반사된 STOP를 보면서 발걸음이 멈춘 나를 보며 갑자기 깨닫게 돼뿟지. STOP는 기냥 스톱이라 멈춰야 한다는 거. 오늘 오후 4시 이후로 내 길이 달라졌다 아이가. 거서 고마 전율이 퐉 일어가 한시간 동안 시키는 대로 멈춰 서 있었다카이.”
귀를 쫑긋하며 듣고 있던 일행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분위기가 흥성해진 테이블에 기장이 말을 이었다.
“내 안 그래도 진사장한테 들었다. 너네가 우리 문 닫힐 뻔한 거 어제도 지켜줬다매. 둘이서 이야기해봤는데, 너거들은 앞으로 평생 공짜다! 언제든 배고프면 와라. 길 앞에 '그날이 오면'이 보이마, 고마 STOP해뿌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수치며 환호하는 후배들 모습에 대완은 빙그시 웃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빈 테이블에 사람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후배들이 이제 행님들 돈 벌어야 하니 자리 비켜드려야겠다며 일어나자, 대완도 포장마차 밖으로 따라 나왔다. 포장마차 뒤 편에서 후배들은 잔뜩 쌓인 소주병을 올려다보았다.
“얘들아. 이게 메인 아니겠나. 얼른 차에 실어라.”
“와 선배님요. 장사가 날로 잘되네요. ‘그날이 오면’이 최곱니다.”
“다 니들 덕분이다. 고민 있으면 내 자취방에 또 들러라. 보는 사람 적을 때 어서 가라.”
알코올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모아둔 빈 병 박스를 이번에도 그들이 가져온 포터에 실었다. 한때 최전선에서 최루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던 대완은 퇴역 군인이 된 기분으로 후배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자신처럼 여전히 일그러진 현실에 저항하며 갈증을 느끼는 후배들이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들과 함께 실려 간 공병은 교정에서 밤새 휘발유와 심지를 넣어 화염병으로 잠깐이나마 타오를 것이다. 조금씩 사라져 가는 포터를 보며 잠시 담배를 무는 대완과 능청스레 포장마차 속 손님들을 맞는 기장은 내심 후배들이 화염병처럼 빨리 꺼져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랬듯 세상에 화가 날 때 타오를 수 있는 것도 젊음의 특권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날이 오면의 공동창업자는 사라져가는 후배들에게 잠시나마 도움과 의지가 되는 선배로 존재할 수 있기만을 바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