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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마른 잎 다시 온기 되어

2부

by 지구 사는 까만별



그날이 못 왔어도 포장마차는 쉬이 처분되었다. 손님이었던 행인들의 공허함을 동행 삼아 대완은 밤낮으로 도서관을 지켰다. 플라타너스가 나뒹굴 때도 그날이 오면은 자갈로 된 터만 남아 땅속에 틀어박힌 카세트테이프의 가요들을 기억해주곤 했다. 대완은 포기할 줄 알게 되었기에 자신의 선택에 전념했다. 그렇게 겨울이 되어, 대완은 동우 형이 다니는 은행에 구술면접까지 끝냈다. 면접이 끝나고 대완은 한동안 소진한 기력을 완충하고자 고향에 내려왔다.

온돌방과 시커먼 가마솥이 들끓는 군불에서 타지의 칼바람에 움푹 파인 대완의 볼살이 서서히 붉어졌다. 자주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앙상하게 마른 아들을 어미는 고향을 찾아온 철새처럼 안쓰럽게 바라봤다. 대완의 어머니는 다시금 아들의 새살을 메꾸기 위해 뜨거운 김까지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을 매번 내었고, 가족 모두 잠든 푸릇한 새벽녘이면 마당의 장독대에서 말없이 치성을 올리곤 했다. 그녀의 치성에는 대완의 안녕보단 객지의 찬 바람에 의해 말라서 내려온 장남을 향한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어머니가 새벽에 퍼 올린 물은 매일같이 투명했다.


누런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매달린 색색의 옷감이 마르는 나른한 겨울 한낮이었다. 대완은 햇살에 의해 바삭 마른 낙엽이 뒹구는 풍경을 바라보다 집 앞동산으로 향했다. 해 질 녘 온돌방을 데울 불쏘시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군불을 때기에 솔숲 갈비 만한 것도 없었다. 대완은 아버지 땀이 묻은 지게에 포대를 싣고 아버지의 지게를 지고서 메마른 언덕을 올랐다. 도시와 달리 느리게 흐르는 이 시간이 마치 밀봉된 평화를 풀어헤쳐 둔 기분이었다. 고향으로 잠시 회귀한 대완은 도심에서 느끼지 못한 느긋함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작은 방에 뒹굴던 작은 카세트를 싣고 온 덕에 지게에서 노래가 솔솔 새어 나왔다. 도시로 나와 있는 사이에 동생들도 성장해 거의 둥지를 벗어나고 있을 만큼 시골집은 한산해졌다. 대완이 집을 나와 있는 동안 부모님에게는 어떤 전하지 않은 수고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자신이 농민들을 위해 해 왔던 싸움들은 결국 농민인 부모님을 호강 못 시켜드리지는 않았나...

많은 농민들을 위해 내 부모님을 마음 졸이게 하는 것이 정당한 소수의 희생일까...


이상적인 꿈을 위해 닻을 올리고 항해하던 ‘그날이 오면’을 제 손으로 떼어내며, 대완은 자신이 바라던 그날들을 떠올렸다.

그날이 오면, 자신의 아버지처럼 농부들의 고충을 대신 표현해주고 싶었다.

그날이 오면, 대완도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도 민주의 빛을 따스하게 쬐고 싶었다.

그날이 오면, 대완을 닮은 후대들이 더 이상 최루탄 냄새를 알지 못하는 세상이길 바랐다.

대완은 그날이 오면 곧게 뻗은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와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대를 회상하다 서서히 망각하길 바랐던 것 같았다. 그날은 해송 앞 파도처럼 가까워지다 멀어지길 반복했고, 대완은 결국 바닷물 적시기를 그만두었다.

포기할 것이 생긴다는 건 솔직히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선희 씨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택한다고 대완이 고독에서 벗어날 자신은 요원했다. 고독에 의해 부조리를 알았고, 고독에 의해 부조리에 저항해 온 대완이었다. 대완의 원동력은 고독이었다. 대완은 처음 책보자기 속 교과서를 쏟으며 달리던 숲 속에 다시 돌아왔다. 숲 속을 떠나오면서 대완은 책보자기 속에서 무엇을 놓치며 달려왔을까. 대완은 잃은 것을 모두 잊은 척을 하며 한동안 갈비를 쓸어 모았다.



음악을 들으며 산길에 수북한 갈비들을 두 포대 째 긁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가요와 소나무의 절개 사이로 집에 계실 아부지 음성이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완아. 어딨노. 완아...”

“아부지요. 저 여 있심더.”

대완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목청을 높여 대답하자, 잠시 후 아부지가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본 이래로 가장 상기된 표정과 목소리로 아부지가 입을 열었다.

좀전에 니 면접 봤던 은행에서 집으로 전화 왔드라. 붙었단다.”

“아 그래요?”

오래 묵혀둔 소식이라 더 갈구했을 전화를 받고서, 아버지는 소식이 날아갈세라 산새처럼 두 팔을 펄럭이며 숲 속으로 날아들었다. 오랫동안 목말랐을 소식을 입에 물고서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합격통지서를 받을 아버지의 거친 손은 갈비를 긁어모으며 저녁의 온기를 준비하는 대완의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그래. 욕봤다.”


갈비로 그득해진 지게를 지고도 어깨가 홀가분해진 부자는 여유로이 산길을 내려왔다. '아부지는 가장이 되기 위해 그 무엇을 포기하셨을까...'

조금씩 늘어지는 그림자는 부자의 뒷모습을 부지런히 겹치며 집을 향해 서서히 옅어지며 사라져 갔다.




다음화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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