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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숲 속을 향한 묵념

2부

by 지구 사는 까만별


고향의 산길은 뒤돌아보면 언제나 한처럼 구불구불했다. 고불한 전화선을 타고 날아든 은행의 합격 소식이 채 식기도 전에 합격통지서는 꼬부랑 언덕을 넘어 누런 마당에 도착했다. 집배원에게 소포를 받자마자 대완은 어머니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어머니의 겨우내 얼어있던 볼은 시커먼 부엌의 군불처럼 뜨거운 눈물에 데어 그날따라 더 붉었다. 대완은 우는 어머니를 안아드리자, 산바람에 부쩍 작아진 어머니가 대완의 품에 쏙 들어갔다.


오후가 되자 대완은 다시금 숲 속으로 산책을 나갔다. 숲은 언제나 대완에게 평온과 죄책감을 불러왔다. 어쩌면 대완은 산의 고요한 꾸짖음이 좋아 일부러 산책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숲은 끝없이 대완이 자신의 꿈을 정녕 버릴 것인지를 물었다. 대완은 가족과 지인이 자신을 안정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경험 앞에서, 자신의 야심은 너무도 쉽게 잊힘을 느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생각으로 지금껏 걸어왔는지 아무도 몰라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객지에서 눈칫밥 먹고 살얼음판 낀 거리 위에서 대치하던 길디긴 정열이 삽시간에 갈무리 맺어진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나는 실로 대의가 아니라 공허로 인해 싸워 왔던 걸까?’ 생애를 걸친 냉기가 지나간 순간 위로 여린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자 대완은 그 약한 바람에도 쉴 새 없이 흔들리던 ‘그날이 오면’ 비닐간판을 떠올렸다. 작은 바람도 저항 없이 펄럭이던 포장마차와 자신은 이제 장남과 가장이란 이름으로 역사를 뒤로해야 할것이다. 튼튼한 벽돌 속에서도 비판의 초는 끝없이 흔들리길...

대완은 더 이상 흔들릴 수 없는 그날에 정박하며, 자신의 고독을 추모했다.





바람 불고 서리 치는 밤이 길게 이어지는 동짓날, 대완은 어머니가 가마솥에서 퍼준 뜨끈한 팥죽을 몇 그릇이고 속도 없이 먹었다. 연수를 며칠 앞두고 고향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기에, 대완이 내놓는 빈 그릇에 어머니는 몇 번이고 먹을 것을 다시 채웠다. 어머니가 이번엔 동치미를 꺼내러 잠시 장독대로 간 사이, 그 순간 안방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대완이 꼬불꼬불한 선이 연결된 전화를 받으며 도로 앉았다.

“네. 안녕하십니까. 여긴 ㅇㅇ은행입니다만, 혹시 진대완 씨 계십니까?”

“예 안녕하세요. 제가 진대완 입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네. 저는 이 은행 내에 있는 ㅇㅇ신문사의 편집부 안 차장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저희 부서에서 이번에 농민 관련 섹터가 추가되어 이에 대한 인원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신입사원 명단에서 진대완 님 이력서를 봤어요. 전공이 신문방송학과던데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대완은 통화가 길어질수록 이상하리만큼 자신의 심장소리가 커진다는 착각을 했다.

“네, 그래서 혹시라도 진대완 씨가 우리 부서로 오실 의사는 없으신지 여쭈어보려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실 의향이 있으시면 저희 신문사에 간단히 면접 본 후에 바로 전직해서 수습기자로 근무하실 수 있습니다.”


대완은 일순간 몽롱함을 느꼈다. 눈을 뜨고도 이런 달큰한 꿈을 꾸는 순간을 위해 두 눈 질끈 감던 불면의 밤은 또 얼만큼이었던가. 대완은 갑자기 목구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오는 기운을 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차장님 감사합니다. 입사 준비하면서도 은행 내에 신문사가 따로 있는 건 몰랐네요. 실은 이전에 몇 년간 언론고시도 준비했었습니다. 제안 감사합니다.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안 차장은 안도의 목소리로 대완에게 대답했다.

“아이고, 잘 됐습니다. 자세한 건 연락이 갈 겁니다. 그럼 언론 부서에서 곧 뵙겠습니다. 진대완 씨!”


대완은 자신의 인생에서 찾아온 몇 안 되는 행운에 정신이 맑아졌다. ‘그날이 오면’이 정박하자, 낯선 동료들과 신문지 위를 순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완이 홀로 있도록 해준 삼림은, 오래전 터를 가르고 다듬어 옹기종기 정착했을 조상님의 짙푸른 흔적이었다. 대완은 자신의 고독을 지켜준 조상되시는 농민들에게 보답하고자 유유히 상경 준비를 마쳤다.




다음 화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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