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M대학교 후문의 쓸쓸한 거리에는 매일같이 포장마차의 불을 밝히는 등대지기가 있었다. 무기한으로 정박해 있는 등대는 후배와 행인들의 편안한 쉼터였다. 하지만 등대지기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것은 손님의 권한이 아니었다. 비 오는 막다른 골목에서 한 사회인이 등대지기에게 우산을 건네주기 전까지는.
손님들에게 오뎅국물 정도의 따뜻함을 내어주던 대완은, 최근 들어 자신의 마음에서도 어묵국물 정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수입이 안정된 일터로 떠난 기장의 공백을 선희가 퇴근하고 틈틈이 들러 메꿔 주었고, 하나둘씩 취업한 후배들이 직장 동료를 데리고 포장마차에 놀러 오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포장마차에 찾아오는 지인들은 대체로 대완이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자신을 대신하여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격려하였다. 별말 없이 재료 다듬기를 돕는 선희도, 직장에서 제법 떨어진 이곳까지 동료들을 끌고 오는 후배들도, 아무 말 없이 안주를 먹다 일어나는 직장인들도 내심 대완이 당신들의 청춘을 대리해 주길 바랐다.
현실성이란 이름으로 낭만을 잃은 부류 중에는 대완의 꿈을 점차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당장 며칠 전에도 포장마차를 찾은 대식이 형이 어묵을 꼬지에 꽂고 있는 선희를 보더니, ‘니는 어떻게 결혼도 하기 전에 제수씨 손에 물을 묻히노.’ 농담처럼 한 마디를 던졌다. 대완은 사촌 형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군상이라 생각했다. 모두가 속으로는 대식이 형처럼 생각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다고 대완은 곱씹었다. 매일같이 떠오르는 해와, 매일같이 쌓여가는 술병과, 매일같이 모자란 통장 잔고는 조금씩 대완의 청춘에 경종을 울려댔다. 큰 바다를 꿈꾸며 설거지를 하면서도 수도세 고지서를 생각하면 갈증이 나는 현실에도 대완은 일어나야 했다. 등대지기는 해갈을 위해 바닷물을 마시고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밤. 동그란 테이블을 둘러싼 손님으로 흥성거리는 늦은 시각이었다. 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동우 형이 찾아와 포장마차 마감을 소주병과 시집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대완이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더 종횡무진 테이블 사이를 지나다니고 있는데, 구석의 무리에서 욕설이 오가기 시작했다. 무리의 짓궂은 표현처럼 들렸던 말소리는 점점 한 남자의 고성방가로 온 포장마차에 울려댔다. 그렇게 포장마차에 취객의 소음이 이어지자,
“보이소. 여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좀 조용하입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옆 테이블의 손님이 참다못해 한 소리를 했다.
“어이, 말 다 했나.”
휘청거리는 취객이 일어나 옆 테이블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테이블 위의 술병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벌건 내용물을 쏟아냈다. 잠깐의 정적동안 소주병이 바닥을 데구르르 울려대는 소리만이 흘렀다.
‘저 사람도 나를 한심하게 생각한 거겠지.’ 상을 엎고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취객을 보자 대완은 한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시 눈이 밝아지자, 빈 박스가 취객 옆으로 높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대완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취객을 달래고 귀가를 종용했지만, 취객을 제외한 나머지 손님들이 눈치를 보며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동우 형이 취객을 택시 태워 보내자, 포장마차에는 동우 형과 대완만 남아 한동안 초침 소리만 감돌았다. 평소 존경하던 동우 형이 자신으로 인해 손님들이 손바닥 위 모래알처럼 스르르 흩어지는 모습을 다 지켜봤다 생각하니, 대완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동우 형은 말없이 엉망이 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대완은 조용히 일어나 엉망이 된 포장마차 실내를 정리하고, 동우 형은 술상을 준비했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정리를 끝낸 대완 앞에 넉넉히 담은 술상이 담겨있었다. 동우 형이 잔을 가득 채워주고 취기가 오른 대완을 향해 말을 시작했다.
“대완아. 오늘 보이 니가 그동안 욕 마이 봤구나 싶었다.”
“......”
대완은 고개를 숙였다.
“완아. 니 꿈을 뺏는 건 아인데, 내가 봐도 닌 장사할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신문사니 신문기자니 다 좋지. 근데 노력과 시간이 들어도 잘 안된다면 멈춰서 한번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나. 현실과 타협을 좀만 하면 괘안은 일들도 제법 있을 거다.”
동우는 자신의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대완에게 건네주었다. 동우의 명함이었다.
“내 생각엔 니 실력과 여태 니가 들였던 노력만큼만 투자하면 내가 다니는 은행에도 충분히 합격할 것 같은데, 우에 생각하노? 고지식한 나도 다닐 수 있다면, 니도 문제없이 다닐 수 있을 거다.”
동우 형의 뜻밖에 조언에도 대완은 놀랍진 않았다. 하지만 형에게 고해성사가 하고 싶어 졌다. 대완은 소주 한 잔을 그대로 삼키고는 묵혀둔 말을 토했다.
“형, 장사해 보니 제가 장돌뱅이 기질이 좀 있는 거 같아요. 손님이 가게에서 화내면 당장 가게를 접고 옮길 것처럼 화가 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동업자가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고생해도 쉽게 접을 수도 없어요. 평생 마음을 둔 곳 없이 여러 군데 옮기면서 살아서 그런가, 저한테도 정박할 곳이 있다는 게 잘 믿기지가 않네요...
형. 제가 관둬도 되는 거겠지요?”
동우 형은 대완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완아, 생각해 보니 너 처음 본 게 고등학생 때 대식이 방에서 구나. 생각해 보면 닌 고등학생 때부터 고향집을 떠나 남 눈치 보고 산 거 아니겠나. 오래간만에 꿈이 생겨서 잡으려는 마음은 알겠다만, 꿈을 이루어도 니 외로움은 여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정이라는 건 꿈을 이루는 것 이상으로 네 마음을 온전히 채워줄지도 모르잖아. 적어도 난 그렇더라.”
대완은 동우 형의 시집 사이 끼워져 있는 책갈피를 쳐다보았다. 화목해 보이는 가족사진이 예쁘게 오려져 있었다. 꿈을 포기한다는 건 벽돌 같은 마음 사이로 풀이 자라나는 아픔 정도였다. 벽돌 사이를 들어온 고운 씨앗이 나무가 되길 바라며, 대완은 동우 형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 씨앗은 대완을 잿빛 마음을 푸르게 멍들이며 대완이 ‘그날이 오면’을 과감히 처분하게 했다. 비닐을 걷어낸 돌바닥 아래로 푸르른 풀들이 발밑을 한동안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