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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고백

2부

by 지구 사는 까만별


토요일 오전 업무를 수행하는 선희의 발걸음은 유독 가벼웠다. 사시사철 흰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 차림이던 선희는 오늘 까슬한 꽃무늬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친한 선배가 오늘따라 선희의 책상에 말을 걸며 다가왔다.

우와, 선희 니 오늘 선이라도 보나?”

선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선이라니요, 그냥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부정하는 선희의 말에 넘어갈 성정의 사람이 아니었다. 선배 언니는 선희에게 가까이 가서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 회사 앞 포장마차 아저씨 맞제? 저번에 회식 때 보이 개안케 생깃대.”

선배 언니의 관통에 선희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 언니는 선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선희야, 잘 되면 월요일에 보고해래이.”


선배 언니에게 고백한 시간이 무색하게 선희의 시계는 벌써 저녁을 가리켰다. 점심만 먹겠다던 선희는 자연스레 대완과 경양식 집을 나와 다방에 들어갔고, 다방을 나와 호프집에 따라 들어갔다. 호프집에서 맥주와 과일 샐러드를 비워가다 보니, 창 밖에 토독토독 잘게 부서지는 파편들이 마음을 두드렸다. 대완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선희 씨, 오늘도 우산 가져오셨어요? 안 가져오셨으면 이번엔 제가 씌워 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선희는 가방 속 삼단 우산을 모르는 척 대완의 장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든 대완의 오른손에 진동이 퍼져나가자 우산 속 또 다른 우주가 진동에 발맞추어 걸었다. 낙하하는 빗물처럼 출렁이는 마음은 살아남느라 오래도록 경시된 서로의 외로움을 찬란하게 물들였다. 격리되어 살아온 두 우주는 서로의 궤도를 스치며 위성처럼 그날 밤 그들은 천천히 빗속을 배회했다.

“선희 씨, 그날 빌려준 우산 덕분에 우리가 오늘 함께 하고 있네요.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선희를 바라보며 진심을 다해 인사하는 대완에게 선희가 답했다.

“아니에요. 그날 비 온다고 우산을 미리 챙겼는데, 업체 직원이 양우산을 사무실 직원들에게 나눠주더라고요. 그날 회식 마치고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를 향해 우산을 펼치는 데, 그 순간 이상하게 사장님은 우산이 있으실까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회식할 때 보니 바빠 보이셔서 우산 챙길 여유도 없어 보였거든요. 여분 우산 있어서 선심 썼을 뿐인데, 덕분에 맛난 식시도 얻어먹고 우산으로 귀갓길을 배웅도 받고 있네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에 묻혀 두 명의 차분한 대화에 귀 기울이게 했다. 대완은 자신의 고독을 가려주는 선희가 너무 크게 보여 자신을 더 냉소적으로 말했다.

“선희 씨,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포장마차에서 이따금 잠을 잤기에 여분 우산이 필요가 없었어요. 꿈은 있지만, 아직 제 꿈을 보여드리지도 못하고, 부모님 호강도 못 시켜주고 있어요. 이기적이지만, 저는 아직 꿈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당분간은 꿈을 향해 걸어가고 싶습니다. 선희 씨는 제가 만나기에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끝없이 고민하던 저와 다르게 일치감치 성실히 해왔고, 그러면서도 거리의 포장마차 누군가의 우산도 챙기는 섬세한 사람이잖아요. 선희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힘든 길 따라가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좋은 사람과 계속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부딪칩니다. 당분간 금전적으로는 좀 부족해도, 꿈을 꺼트리지 않고 선희 씨의 마음을 외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가진 거라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밖에 없는 이런 저를 믿고 함께 해줄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고백에 한 여름에 홍조가 띠었다. 선희는 만나는 사람 없냐고 만날 때마다 물어보는 엄마와, 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쉼 없이 일을 해오던 자신을 생각했다. 부모님은 선희가 언제든 일을 관둘 수 있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을 만나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선희는 오늘 만나는 내내 당연하다 생각했던 자신의 삶을 인정하는 대완의 말을 지나치기 어려웠다. 당연한 삶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선희에게 너무도 간절했다. 선희는 차분히 대답했다.


“하다못해 꽃도 저마다 개화 시기가 다른데, 당연히 사람도 좀 늦게 필 수도 있지요. 저도 대완 씨 진중한 모습이 좋아요. 대완 씨의 꿈을 기다려줄 테니, 대완 씨도 약속한 대로 저 외롭게 하진 말아요.”

짓궂은 장마철의 습윤한 열기가 짙푸른 청춘남녀 여름 풍경에 후덥지근한 물기를 더 세차게 뿜었다. 방향이 흐려져서 고독한 남자와, 방향을 고를 수 없어 외로웠던 여자는 오래도록 회색빛으로 배회하다, 마침내 동그란 파문처럼 서로에게 의미가 된 투명한 여름밤이었다.









https://youtu.be/4G-YQA_bsOU?si=P4rUIoc0nAzUP0j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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