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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팍크 May 15. 2024

4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는 것은



사람이 시간이 많아지면 생각도 많아진다. 바쁠 때는 늘 많은 것을 제쳐 놓는다. 많은 것에는 운동, 건강한 음식, 독서, 영화 보기, 그리고 '나'에 대한 고민이 포함된다. 직장이라는 고속도로에 나를 일단 올려놓으면, 다른 길로 빠지기보다는 계속 달려 조금 더 앞에 있는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된다. 운용역으로 일하다 보면, 투자역을 해야 하고, 투자역을 하다 보면 LP사이드로 가야 하고. 정신 차려 보면 나라는 사람은 온 데 간 데 없고, 관성에 의존하여 꿈꾸고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의도와 강남에서 3년간 일을 했다. 어릴 땐 드라마에 나오는 직장인들이 멋지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칼각 양복을 입고서는 멋지게 프레젠테이션을 해내고 고군분투 후에 모종의 승리를 거두는 모습은 짜릿했으니까. 우리 엄마도 항상 말했다. 직장에서 멋지게 승승장구하는 커리어 우먼이 얼마나 멋지니! 그러나 흰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3년을 일하다 보면 알게 된다. 그 양복쟁이들의 성공 서사는 나의 개성을 제물로 바쳐 얻어낸 것이라는 걸.


하루는 강남역 신호등을 건너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5시간이나 남은 근무에 슬퍼하며 돌아가던 길, 정말 예쁘게 알록달록 자수가 그려진 재킷을 입은 사람을 보았다. 그제야 그 주변이 얼마나 칠흑같이 어두웠는지, 끔찍하게 똑같았는지 알게 되었다. 100이면 100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 사이에서 예쁘게 수놓아진 재킷은 그 거리의 명암을 극대화시켰다.


지금은 시간이 많은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이 행복도 곧 끝날 예정이지만, 그간 일과 연관되지 않은 그냥 '나'로서의 '나'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원증도, 정장도, 아웃룩도 벗어내고 새로이 발견한 내 모습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큰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 안의 일을 하는 것을 즐긴다. 날씨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다. 물을 정말 좋아한다. 눈앞에 미래가 그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일이든 취미이든 고정/반복되는 일보다는 변동성이 있는 일을 좋아한다.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시사/경제보다는 문화/역사를 좋아한다. 사진이나 이미지보다는 텍스트를 좋아한다. 노래가 감정 상태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기분이 좋을 때를 제외하고는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만나 노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조그마한 데이터들을 모으고 모아놓으면, 내가 어떤 상황일 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지 조금 알게 된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너무 멀지만, 만족할 수 있는 길은 비교적 도달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걸 버리고 어떤 걸 취해야 내가 만족할 수 있는지 힌트가 보이는 것이다. 일과 목표에도 이런 힌트는 많은 도움이 된다. 기왕 일론머스크가 될 수 없다면, 돈은 잘 못 벌지만 글만 쓰는 작가로의 살고 싶다든지. 혹은 난 큰 리스크는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니 스타트업을 차리든지. 혹은 날씨가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 서울에서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직장이나 국가를 바꿔보든지.


요즘 나의 미션은 이렇게 얻은 힌트들을 쭉 나열해 놓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내가 하는 선택에 조금의 근거를 마련해 주고, 추후에 돌아봤을 때 미래의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서사를 만들어주는 것. 그게 나라는 사람을 한 영화 속 캐릭터로 봤을 때, 지금 내게 부여된 임무라고 느껴진다. '나'에 너무 집중한 삶은 오히려 괴롭다고 하던데, 그 말이 온전히 이해가 가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만큼은 '나'에 대한 고민을 더 해 나가야겠다. 그리고 때가 되면 너, 우리, 그들까지 넓혀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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