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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Jun 13. 2020

오, 마이 글쓰기 슬럼프






드디어 온 것 같다. 슬.럼.프.


기사도 쓰고 책도 쓰고 그렇게 쉬지 않고 글을 쓰면 지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다음처럼 대답할 수 있음에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요. 여전히 글 쓰는 게 너무 재미있고, 계속 쓰고 싶어요."


오늘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저리 호기롭게 답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게요, 진짜 그러네요" 이렇게 말해버리겠지. 슬럼프 중에서도 일종의 번아웃 증상인 듯싶다. 준비하고 있는 세 번째 책의 원고 초고를 지난 5월 초에 완성했는데 그 이후에 글쓰기를 거의 못하고 있다. 안 하고 있기도 하고. 물론 기사는 계속 쓰고, 일기라든지 혼자 쓰는 수필도 쓰긴 하지만 좀처럼 열정적 글쓰기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내 맘 같지가 않다.


하얗게 불태워서일까. 고갈된 듯하다. 이 슬럼프를 극복할 마음조차 안 든다. 모든 일이 그렇듯 슬럼프가 왔다면 그 슬럼프에도 존재 이유가 있겠지 뭐. 한동안 쓰지 말고 좀 쉬라는 신호가 아니겠느냐며 나는 번아웃 상태를 될 대로 돼라 하며 받아들였다. 한 달 정도 늘어져 놀았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답답하게 놀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영상도 모조리 찾아보고 마음 가는 대로 좋아하는 것들 위를 둥둥 떠다녔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쓰고 싶지 않다. 특히나 오늘은 토요일이고 밖에 날씨도 좋다. 만날 사람이 없다. 오늘 같은 날 나간 사람은 더워서 후회할 거라며 혼잣말하다가 결국, 이끌린 듯 브런치를 열었다. 나조차도 놀랐다. 지루하고 따분한 나머지... 글쓰기 버튼을 누르다?


슬럼프가 심해지자 글쓰기가 하고 싶어졌다.


이 아이러니에 관해 얘기하고자 이 글을 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무기력의 최고조에 다다르니 열정 비슷한 게 내 뺨을 훅 스치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바람. 어이가 없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제 무기력이란 산 정상에서 내려올 일이 남았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한 가지를 배웠다. 글쓰기 슬럼프도 글쓰기의 한 부분이라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시간 동안 난 허송세월을 했다고 여겼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슬럼프 때문에, 그 덕에 새로운 글쓰기 영역으로 들어선 것 같다. 여태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지향하는 바'에 관해 썼지만, 오랜만에 다시 쓰는 오늘은 '지금 내 상태에 대해' 쓰고 있다. 이런 류의 글을 쓴 적이 별로 없었다. 슬럼프, 번아웃, 싫증, 무기력... 이것 자체가 글쓰기의 소재가 된다는 걸 몰랐던 걸까. '이것 조차도' 글쓰기가 될 수 있구나, 현재 내가 어떤 상태이건 이 순간의 내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감정을 받아쓰면 되는구나 싶었다.


별 것 아닌 발견 같지만 꽤 큰 전환점이 됐다. 글을 통해 '무언가 하려고' 했던 내가 슬럼프 끝자락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 예전 같으면 슬럼프를 극복하자! 말했을 텐데, 오늘은 아니다. 인터뷰했던 가수들이 떠올랐다. 맞아, 표현하는 사람은 그런 거였어. 추구하는 바에 관한 노래를 부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최근에 느꼈던 감정 가령 외로움, 고독, 공허함에 관해서도 있는 그대로 노래하잖나.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표현의 범위는 세상 모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노래 바깥의 삶도 다 노래이고, 삶 바깥의 자신도 실은 자신이니까. 


글쓰기 바깥에 서 있다고 여겼던 나는, 내가 발디딘 그곳이 실은 글쓰기란 울타리 안이었음을 알았다.  


슬럼프는 결국 리뉴얼의 한 과정이었다. 슬럼프는 유의미한 반환점을 결과물로 남긴다. 오늘 이 반환점을 돌면서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은 건 이왕 그렇게 된 거 슬럼프 안에 가만히 머물러 보라는 거다. 펜을 들지 않았다고 해서 글쓰기를 놓아버린 건 아니니까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쓰기 위해 안 쓰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그 문 앞에 앉아서 심호흡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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