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책, 그리고 아이들
이태원에 영혼이 계속 머무르는 날들이다.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일상을 파고들 때면 조금 거리를 둔다. 그래도 또 살아야지. 그러다가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또 기사를 열어보고, 한숨짓고 눈물이 고이는 반복된 날들. 이태원을 잠시 잊고 다른 주제로 글을 써보지만,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이내 다시 이태원으로 돌아와 글을 끼적인다. 문득 고개를 드니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덧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시간이 참 속절없이 흐른다.
첫째는 되고 싶은 게 많다. 대통령, 과학자, 만화가, 축구선수 등. 이따금 내게 섬 시골에 살다가 대통령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DNA를 구해 공룡을 부활시킬 수 있을지, 만화를 그리면 어떻게 돈을 벌게 되는지를 묻기도 한다. 그러던 첫째가 생애 첫 만화책을 만들었다. 어릴 때 [라바] 시리즈를 좋아했는데, [라바]를 모티브로 한 만화책을 그렸다. 엄마 아빠 생일 선물이라며 생일이 오기 열흘 전부터 혼자 종이를 접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떠올려 만든 책이다. 종이에 '생일 축하해요' 정도를 적어 선물로 건네던 아이가 어느덧 자라 나를 위해 제대로 된 무언가를 만든다는 사실이 자못 뭉클했다.
등장인물은 쇠똥구리와 사마귀, 그리고 새 한 마리. 등장인물 소개와 차례를 지나면, 이야기는 여러 개로 나뉘어 진행된다. 우당탕탕 부대끼는 이야기의 배경은 뉴욕으로 갔다가 우주로도 날아간다. 제일 뒷장에는 부록으로 색칠공부도 있다. 아이의 상상과 재미가 담긴 책을 바라보며 많이 컸구나, 이 아이의 생애 첫 만화책이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아이는 그렇게 아이만의 지도를 그려 나간다. 반복되는 하루하루지만 그 안에서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 나간다.
오늘은 금요일, 병설유치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날이다. 도서관에서 미리 고른 책 두 권을 가지고 교실로 갔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털이 난 뱀의 이야기다. 너무나 무서워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지도 못하던 뱀이었지만, 어느 날 자라난 머리털로 뱀은 다른 동물들과 가까워진다. 모자를 씌워주기도 하고, 여러 스타일로 변신을 해주기도 하는 다정한 동물 친구들. 뱀은 머리털이 없던 외로운 시절을 떠올리며 털이 난 지금에 만족하기로 한다. 윤기 나는 머리털을 날리며 숲을 기어가는 뱀의 모습이 퍽 웃겼던 책. 머리에 털이 난 뱀을 본 적이 있냐고 물으니, 너도나도 있다고 대답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책이 마음에 들었는지 덮자마자 다시 읽어달라고 졸라댄다. 시간상 그럴 수 없어 책을 더 보라며 교실에 두고 나왔다.
책을 읽어주는 사람들은 바로 도서관에 모여 그날 읽은 책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학년별로 너무나 다른 아이들의 온도와 반응들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책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금세 카페 문을 열어야 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잰걸음으로 돌아온다. 겨울이 가깝다는 게 느껴지는 바람이 찬 아침이다. 마당 냥이에게 수북이 사료를 부어주고 카페 문을 열고, 흔들리는 커튼을 바라본다. 책 읽어주는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다. 오늘 학교 도서관에는 새로 들어온 책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참 많은 이야기들이 읽히기 위해 기다리고 있구나. 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있구나. 두서없이 떠오르는 상념들. 좋은 이야기가 있어, 해맑은 아이들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덕분에 가슴에 뚫린 구멍이 조금씩 좁혀진다.
정리된 글을 도무지 쓸 수가 없어 그저 떠오르는 대로 글자들을 나열한다. 에세이든 산문이든 편지든 형식일랑 집어던지고 그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간다. 그러면 글이 되겠지. 글이라는 게 항상 정리가 될 수는 없지. 어떻게든 그렇게 마음을 써내고 비워내면 다시 또 오롯한 글 하나를 쓸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나겠지. 이태원에 머무는 영혼이 언제 다시 제자리를 찾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눈물이 차오르는 스스로를 이렇게 글로 다독인다. 당연한 거라고, 마땅한 아픔이라고. 함께 이겨내야 하는 그런 순간이라고. 정리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삭막한 세상이지만 글과 책과 아이들이 있어 작지만 큰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