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Nov 27. 2023

정신 나간 한 달

사바아사나와 케세라세라가 필요한 시간

일을 미루지 않는 편이다. 이전보다 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이 탓인지. 하고 있는 역할이 많아서인지. 때문에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후다닥 생각난 김에 바로 처리해버리는 편이다. 그래야 잊어서 발생하는 문제를 방지할 수 있고, 나도 마음 편히 또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기에. MBTI에서 나는 완전 P인 무계획의 사람인데, 이 미루지 않는 습관 때문에 타인에게 완전 J가 아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나는 P인데 말이지.


그러던 내가 11월 한 달 동안, 말일이 원고 마감일이 있는 한 달 내내 일을 미뤘다. 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일이 있는데도 다른 데 자꾸 한눈을 팔았다. 평소에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눈이 벌개질 때까지 끝장을 봐야 끝내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기에(시즌6, 7짜리 미드를 일주일에 몰아보는 스타일이랄까...;; 물론 결혼 전의 이야기지만...) 일상이 흔들리는 게 두려워 웬만하면 시작하지 않는다.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신뢰하는 배우의 작품이 아닌 이상은 패스하는 것. 그러던 내가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속으로 계속 '미쳤네', '미쳤군'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드라마 보기에 시간을 할애했다.


입덕도 했다. 싱어게인3를 보다 한 가수에 꽂힌 것. 아 입덕까지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지. 음악도 한 번 꽂히면 주구장창 한 곡만 반복해서 듣는 편이다. 남편이 옆에서 혀를 내두른다. 또 듣는다며. 그런데도 뇌에서 자동 반복 재생이 되니 계속 들을 수밖에. 그러다가 깨달았다. 이건 덕질인데? 다들 잔뜩 긴장해서 하는 무대를 혼자 찐으로 즐기며 하는 모습을 보자니,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 음악에 진심이고 절실한 뮤지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완벽보다는 빈틈이, 이성보다는 감정이 움직여야 팬이 된다. 드라마를 정주행하더니 이제 덕질까지 한다니. 미친 게 틀림 없구나!


처음에는 딴짓이라고 생각했다. 딴짓은 회피라 여겨지지만, 뇌과학적으로는 환기를 통해 더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걸 알고는 때로 무의식을 믿곤 하는데, 딴짓을 하면서 나는 내 무의식 속의 자아를 믿었다. 이 딴짓도 내게 무언가를 남길 거야. 그게 결국 내 글에 영향을 미칠 거고. 딴짓은 좋은 거야. 오히려 더 일에 집중하는 효과를 줄 수도 있어. 이런 식으로 합리화를 해댔다. 그렇게 바쁜(?) 한 달을 보내고 어느덧 11월도 나흘만 남았다. 마감이 진짜 코앞인 것.


일상글도 거의 안 쓰고 있었는데. 글쓰기 모임도 한 달 쉬어 가기로 했는데. 쓰는 거라곤 책 원고 뿐이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은 책에 대해 리뷰를 쓰고 싶어도 꾹꾹 참아왔는데. 그런데도 나는 미루기를 싫어하는 원래의 내 모습을 내버리고 미루고 또 미루는 이상한 자아를 장착한 채 한 달을 살았다. 일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정리를 많이 하긴 했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어딘가 아쉽고 무언가 빠진 것만 같은, 그게 글인지 내 집중력인지도 모른 채 시간을 흘려 보낸 것. 나는 분명 낯선 시공간에 올라타 있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만 같고.


부끄러워서 이런 내 모습은 글에 담지 않으려고 했다. 내 이름을 걸고 책을 쓰는데 이렇게 산만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영 께름칙했던 것. 그런데 결국 용기를 내어 이렇게 내 모습을 까발리는 건, 이게 나니까.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나니까.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안심할 수도 있을 테니까. 저런(?) 작가(?)도 있구나!


마감을 앞둔 작가라 하면 왠지 정해진 루틴대로 하루하루를 살고, 딱딱 각 잡힌 계획대로 원고를 하나하나 마무리 해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그러기는커녕 이걸 했다가 저걸 하고, 평소 안 하던 짓이나 하고, 막판에는 독서에도 잘 집중을 하지 못했다. 내 글은 대체 몇 번을 읽는 건지. 읽으면 읽을수록 나아져야 글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뭔 말을 하고 있는 건지 파악이 안 되는 요상한 상황이라니. 안 풀리는 글을 붙잡고 있는 것만이 답은 아닌 것 같아 다소(?) 딴짓도 했는데, 잘한 짓인지 정신 나간 짓인지...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고 나는 최선을 다해 남은 기간 동안 마무리를 하는 수밖에. 이제 더는 돌아갈 곳도, 방황할 시간도 없다. 정말 머릿속에 있던 작가들의 모습대로 루틴대로 계획대로 하나하나 마무리를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꾸 무거워지는 두 어깨를 가벼이 하는 것뿐. 첫 책이라는 생각에, 이 책으로 진짜 내가 까발려진다는 염려에,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에, 자꾸 어깨가 뭉치고 힘이 들어간다.


요가 마지막 자세인 사바아사나를 떠올린다. 송장자세, 시체자세라고도 불리는 동작으로 완전한 휴식을 배우는 자세다. 바르게 누워서 온몸에 힘을 빼고 생각도 내려놓고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 유연성이라고는 하나 없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단 하나의 힘도 남기지 않고 손끝 발끝까지 툭 바닥에 떨구고 나면 마냥 평화롭다. 모든 긴장은 사그라든다.


송고를 하고 나면 나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희뿌연 연기로 가득찬 머릿속을 애써 비운다. 더 채우려고만 했던 욕심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나직하게 되뇌는 한 마디. 이럴 때면 둥실 떠오르는 한 문장. 케세라세라(Que sera sera, '될 대로 되라'는 뜻의 스페인어). 사바아사나의 마음 버전이라고나 할까. 사바아사나 케세라세라.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면 또 어떻고.            

매거진의 이전글 열한 번째 제주의 가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