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옷은 무엇일까
모조리 한데 모아 쿡쿡 쑤셔넣고 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 내다버리고 싶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있다. 그 속의 내가 너무 구리고 구려서 아무도 몰래 조용히 감춰버리고 싶은 그런 시절의 이야기. 막 허물을 벗어버린 갑각류처럼 연하디 연한 살로 내 온전한 색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헐벗은 몸으로 온 세상을 마주하던 어떤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을 견뎌낸 뒤 나는 아주 조금씩, 서서히,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제법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 단단함은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던 바로 그 시절로부터 마침내 시작된 것. 그러니 마음 속 깊은 곳에 폐기처분 해두었다가도 이따금 꺼내어 볼 수밖에 없다. 그 시절의 친구가 있고, 그 시절의 부끄러운 나 역시 나의 일부였으니.
갑자기 친구가 찾아왔다. 섬에서 카페를 하다보면 이따금 이런 기적같은 만남이 일어난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 중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 내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고 가는 이들이 있다. 아무리 추레한 모습의 나라도 실망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들.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을 어느날 문득 기적처럼 만나고 나면, 나는 한동안 앓는다. 너무 충만해서 앓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소환되는 지난 날의 기억들. 그 속에서 내가 건져내야 하는 단서들.
글옷을 찾고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기에 어떤 형태의 글이 좋을지, 오래 고민해왔다. 처음엔 소설이었고, 최근에는 에세이로 가닥을 잡았다. 나는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야. 아이들이 '엄마 이야기 좀 들려줘요.'하면 머리가 새하얘지는 내가 무슨 소설가가 될 수 있겠어. 에세이나 칼럼 정도가 내게 맞아. 그렇게 거의 결론을 낼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분명, 다시 소설이다. 소설 곁을 빙빙 돈다. 에세이를 아무리 써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걸 채우려면 결국은 소설이라는 걸 몸으로 안다. 이 세상에 소설이라는 틀보다 더 자유롭고, 무엇이든 말해도 좋을 그런 바다가 있을까. 그런데도 내게는 맞지 않는 옷이라 생각해왔는데,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다.
글을 쓰는 습관과 감각 때문에 어떻게든 글을 쓰려고 발버둥 쳐온 지난 8개월. 얼마 전부터, 글옷에 대한 고민이 다시 혼란해졌을 때부터, 내가 쓰는 모든 글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만 같다. 같은 말을 하고, 비슷한 단어들만 뱉고, 멀지 않은 자리들만 맴도는 느낌. 글을 쓰면 쓸수록 그런 느낌이 선명해지면서, 나는 쉽게 글을 쓸 수 없었다. 쓰다가 마는 글들이 늘어갔다.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처박아둔 글들. 그 글들 안에 갇힌 건 무엇일까. 나의 생각일까. 나의 글일까. 그저 글자들일까.
타인의 소설을 읽고, 타인이 쓴 드라마를 본다. 한동안 펼치는 것 자체를 너무 망설여 멀리해 오던 것들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한다. 나와 밀도나 궁합이 맞는 글이나 영상을 본다는 것, 그 쾌감을 다시금 곱씹는다. 누군가가 창조한 세계와 사람과 고뇌와 갈등과 그리고 여백들까지. 하나하나 놓칠 수 없는 지점들을 되뇌인다. 내가 왜 새로운 이야기 하는 것을 망설였는지, 새로운 세상을 글자로 창조한다는 건 무엇인지, 다시금 잘근잘근 씹어본다.
내가 이렇게 욕망한 무엇이 이전에 있었던가. 글을 쓰겠다 다짐하고 내가 목표로 잡은 건 단 하나다. 후회하지 않을 때까지 쓰는 것. 다시 돌아봤을 때 무엇이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했다 느낄 수 있도록. 인생을 통틀어 한번쯤은 그렇게 온 살갗이 다 벗겨지도록, 내 몸을 바쳐 장렬히, 부서지고 부서져 가루가 될만큼, 치열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긴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아도 절대 후회 따위는 남지 않도록.
장편 하나를 쓰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감정 속에서 지옥같은 몇 달을 살아낸 뒤 겁이 났다. 소설을 쓸 때마다 이런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게. 대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어떻게 이런 과정을 매번 겪고 또 이겨내고 다시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인가. 그런 과정 속에서 그들의 현실은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건가. 이런 의문이 들수록 나는 소설을 내려놓고만 싶었다. 꼭 소설이 아니어도 된다고 자위하던 시간들. 그런데 어느 순간 채워지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소설로만 채울 수 있는 우물이 내 안에 있다는 걸 감지한다. 이래서 결국 또 쓰고야 마는 걸까.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 속으로 다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고 싶다. 새롭게 짜놓은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물들과 울고 웃고 싶다. 그들과 함께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그들과 함께 단단해지고 싶다. 그렇게 세상과 맞서고 싶다. 카페와 육아, 살림으로 접근조차 쉽지 않다 생각해왔는데. 팩트일까, 핑계일까. 다시 내 시간들을 낱낱이 뜯어본다. 그렇게 다시 소설이다.